I. 머리말
II. '君'호 관련 사료의 검토
III. 왕족에 대한 爵號로서의 '君'호
IV. '君'호 소지자의 역할과 君號制의 의미
1. '君'호 소지자의 대왜관계에서의 역할
2.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君號制'의 의미
V. 맺음말
요약
본 연구에서는 5세기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의 ‘君’ 칭호에 주목하였다. ‘君’ 칭호의 소지자는 백제의 왕족으로서 왜에 일정한 기반을 두고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軍君’이나 ‘嶋君’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君’ 칭호는 왕제 또는 왕자 등 제한된 왕족집단에게 사여된 일종의 爵號였다.
백제의 君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고구려, 신라, 중국, 일본의 왕실 내지 종실집단과 비교 검토하였다. 고구려 초기 고추가의 범위는 전 왕족이나 왕비족까지 상당히 포괄적이었으나 그 대상이 왕족으로 점차 축소되었기 때문에 王弟나 王子 등 특정 왕족에 한정되었던 백제의 ‘君’과 유사한 면이 있다. 마립간 시기 신라의 갈문왕에는 왕자와 왕제 등이 임명되었으며, 갈문왕은 副王的 존재로서 왕의 유고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백제의 ‘君’호가 왕제와 왕자 등 제한적인 왕족에 한정되고, ‘君’호 소지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점과 상통한다. 또한 백제의 ‘君’호가 왕자와 왕제에 국한되었다는 점은 서진에서 황제·황자에 한해서 封王이 이루어진 것과도 유사하다. 일본에서도 親王으로 있다가 왕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친왕이라는 칭호가 천황이 될 수 없는 사람에게만 붙였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君’이란 존재의 대왜관계에서의 역할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그 활동상이 가장 잘 남아있는 軍君(昆支)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개로왕의 아우였던 곤지의 도왜 목적은 유사시 請兵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일본열도 내의 백제계 이주민을 조직화하여 이들을 기반으로 왜 정권 내의 친백제계 노선을 유지하게 하는 데 역할을 했다. 곤지는 비록 왕권의 핵심부로부터는 배제되었지만, 왜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자신의 기반을 키울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전근대사회에서는 왕권 내지 지배체제의 강화와 관련하여 왕제나 왕자 등의 왕족을 관리, 활용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였다. 백제에서도 국가체제의 정비가 일단락되었던 근초고왕대 이후 왕족을 포함한 왕실집단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문제가 대두되었다. 국왕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핵심세력을 관리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君’호는 ‘王·侯’호에 비해 제한된 왕족 집단에 사여되었기 때문에 ‘君’호 소지자는 왕권을 절대화시켜가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君號制’는 아직은 왕족에 의한 私的, 爵的 질서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君’이라는 작호의 폐지 시점이 작제적 질서 대신 관료제적 질서에 입각한 중앙집권 국가의 성립 시점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백제의 聖王代가 그 시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