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중국 사서에 보이는 흑치
III. 흑치상지의 한화와 가문 선양
IV. 맺음말
요약
백제사에 대한 문헌사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1929년 발견된 「흑치상지 묘지명」은 중요한 자료일 수 있다. 그러나 「흑치상지 묘지명」은 7세기 말엽 당나라 사람들의 현실인식 속에서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한 흑치상지 집안의 가문 선양 의식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흑치상지 묘지명」을 중요 사료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국 사서에서 흑치가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국 사서에서 ‘흑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이빨을 검게 하는 풍습 자체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華夏(9주)와 변방(36국)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던 太行山脈의 동쪽에서 이러한 풍습을 가지고 있던 종족을 지칭하는 변방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흑치는 후대로 갈수록 변방을 나타내는 의미가 더욱 강하게 되었다.
흑치상지는 663년 백제 부흥군을 배반하고 유인궤에게 항복하여 임존성을 함락시키는데 앞장섰으며, 부여융과 함께 당으로 건너갔다. 이후 672년에 당나라 16衛 중 하나인 左領軍衛의 장군에 임명되면서, 河北道 滄州의 속현인 浮陽郡의 開國公에 분봉되고 이곳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흑치상지는 부양군 개국공에 분봉된 것을 계기로 백제의 성씨를 버리고, 당시 변방을 나타내는 의미였던 黑齒를 성씨, 常之를 이름으로 하여 漢化의 길을 걸음으로써 당나라의 지배층에 완전히 편입될 수 있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