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대방지역 진출과 교통로의 확보
3. 북방교통로 및 서해 해로 상실
4. 475년 직후 한성 일대의 상황과 웅진천도
5. 맺는말
요약
백제는 3세기 후반경부터 서해 해로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4세기 전반까지 한강 하구에서 서한만에 이르는 해로를 서서히 장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와 대결하면서 자비령로를 개척하고 황주·봉산·서흥 일대로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375년 수곡성을 함락시킨 후 예성강 상류에 전초기지를 마련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방원령로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백제는 수곡성을 상실함으로써 고구려와의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수세적인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예성강 하류에서 자비령로를 유지하면서 서해 해로를 보호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390년 이후 수곡성에서 장단 방향으로 남하한 고구려군에 의하여 임진강 유역을 공략 당하였다. 이어서 서해 해로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빼앗기고 서해 해로도 상실하였다. 이후 경기만과 서한만의 제해권 및 임진강 하류 지역 육로 요충지가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백제는 5세기 전반부터 서해 해로를 회복하기 위하여 부심하였다. 다소의 성과는 있었으나 390년 이전으로 회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예성강과 임진강 상류 지역에서 백제는 별다른 회복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한성은 방어상 허점이 계속 노출되었다. 다시 475년 고구려의 기습으로 다시 한성이 함락되었다. 두 번에 걸쳐 한성이 함락되었던 것은 백제가 북방교통로와 서해 해로를 상실하고 전략적 요충지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한성은 도성으로서 가치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웅진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웅진천도 후에도 한성은 여전히 백제가 임진강 일대 육로를 복구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웅진천도는 수도가 점령당하는 위험을 줄이고, 고구려와의 전선을 정비하는 조치였다. 차후 북방교통로 회복을 위해 고구려와 결전을 준비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 결과 동성왕대부터 고구려와의 전세를 서서히 역전시킬 수 있었고, 무령왕 말기에는 다시 임진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기존에 웅진천도를 백제의 일방적인 패퇴로 보는 관점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