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 무역망의 형성
III. 백제 무역망의 시련과 대응
IV. 백제 무역망의 재편
V. 맺음말
요약
동아시아국제무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漢이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중심지인 대동강 하류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이후 공손씨정권의 대방군설치와 魏의 동방원정으로 인한 대방군의 접수로 이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백제가 속해있던 삼한지역은 魏의 견제에 의해 동아시아국제무역에서 소외되게 된다. 마한은 이에 대해 岐離營 공격사건을 감행하게 된다. 백제는 이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세력이 약화된 마한의 영도권을 장악하면서 범마한권의 영도국가로 발돋움한다.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은 중국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의 요소 요소에 해양거점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동북아 해상무역을 주도해 갔던 것이니, 그 규모와 체계성, 그리고 적극성의 측면에서, 항로의 길목을 장악하고 중개무역을 일삼던 이전의 위만조선과 낙랑·대방군의 그것을 크게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력은 그의 왕자인 근구수왕대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백제 중심의 국제무역망이 구축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주도적인 세력은 백제왕실이었다. 아울러 중국계 백제인과 木羅斤資 같은 지방세력의 활약도 보이는 시기였다.
5세기 고구려의 남하에 의한 한성의 함락과 웅진으로의 천도에 의해 백제는 시련을 당하게 된다. 이때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대표되는 영산강유역의 재지세력과, 倭의 독자적인 대중국무역의 시도로 인해 백제중심의 무역망은 큰 위기에 봉착한다. 백제는 황해사단항로의 개척을 통해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하지만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으로 인해 백제는 다시 위기에 봉착한다.
5세기말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으로 인해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국무역에 열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은 지속되었다. 이에 백제는 기존의 일본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고구려와도 정치·군사적인 동맹을 통해 신라를 견제하고자 했다. 고구려의 대일교섭은 이러한 와중에 추진되었으며, 백제는 고구려의 대일교섭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무역에서 백제의 역할은 훗날 남북국시대의 신라와 발해에 의한 활발한 해상무역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