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밀접한 교류를 맺어왔다. 특히 백제와 중국의 각 왕조는 매우 빈번한 교류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교류는 해상 교통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고이왕때까지 소급된다. 서울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원주 법천리고분, 천안 용원리고분 등지에서 중국제 자기(磁器)가 출토되었는데, 백제와 중국과의 교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남북조시대에도 해상 교류는 나날이 증가하였으며, 그에 따라 항로 개척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다. 당시의 항로(航路)는 남조의 건강(建康)에서 출발하여 산동반도에 이른 다음, 서해를 횡단하여 한반도의 서해안의 강화만(江華灣)에 이르는 코스다. 수나라가 등장한 다음에는 이러한 전통적인 항로 이외에 더 북쪽으로 발해(渤海)를 거쳐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항로가 개발되었다. 산동반도에서 서해를 가로지르면 속도는 빠르고 간편하지만 위험이 따랐다. 발해를 거쳐 오면 항해는 안전하지만 여러 날을 소비해야 했다.
백제는 우수한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을 갖고 있었다. 고유의 선박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을 신라와 일본에 전파하기도 하였다. 당시 백제 고유의 '백제선(百濟船)'은 인도에도 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백제는 이제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지만 1,400여 년 전 백제에 의해 개척된 한반도와 중국 동부를 연결하는 해상항로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과 중국의 수 많은 항구 도시들이 사용하고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