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관산성전투 전후 사료검토
Ⅲ. 553년 백제의 한강유역상실
Ⅳ. 관산성전투의 배경
Ⅴ. 맺음말
요약
관산성전투를 전후한 기록을 검토하면서 백합들판의 싸움을 553년 10월이 아닌 551년 3월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의 한강유역을 공략할 당시의 기록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554년 9월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진성전투를 553년 9월로 수정하였다. 진성전투가 기록된 삼국유사 진흥왕조는 문제가 많은 기록으로 파악되어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이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라가 백제가 차지한 한강하류유역을 공략하자, 이를 되찾기 위하여 백제는 554년 7월에 관산성전투를 일으켰다. 문제는 신라가 태도를 돌변하여 백제가 차지한 한강유역을 공략했을 때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가 한강유역을 버렸다고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신라측의 기록에도 이 전투를 지휘했던 장군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기간 일어난 각종 전투에는 신라 측 지휘관의 이름이 반드시 명기되어 있는 관례에 비추어 볼 때 흥미있는 사실이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버렸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나름 신뢰할 수 있다는 점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백제는 553년 7월에 버리다시피한 한강유역의 땅을 1년 후인 554년 7월에는 다시 되찾기 위하여 왕녀를 진흥왕에게 소비로 시집보내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을까라는 의문이 당연 제기된다.
이에 대해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백제를 소외시키자 후일을 기약하고 백제는 한강유역을 신라에게 버리다시피 내어주었으며, 1년 후에 관산성전투를 벌였다는 것이다. 이 논지의 핵심은 1년만에 백제를 둘러싼 대외환경이 크게 변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의 밀약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필자는 백제를 둘러싼 대외적인 측면보다는 백제 내부 문제인 왕권과 귀족세력, 귀족세력 내부의 권력관계에 주목하였다. 왕실은 백제왕실의 발상지인 한강유역 회복을 통하여 왕실 권위회복을 기도하기 위하여 군령․성주를 파견하였으며, 해씨와 진씨는 자신들의 옛 세력기반인 한강유역을 자신들의 예전 권력을 되찾기 위한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강유역은 이미 80여년간 고구려의 지배하여 있었기 때문에 한강유역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백제의 출현으로 인한 변동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파장을 예상하지 못한 백제는 결국 신라의 공격에 힘없이 한강유역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1년후 백제는 내부적인 문제를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관산성전투를 일으켰다가, 예기치 못한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의 내부는 더욱 심각한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