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武王의 출자와 즉위
3. 益山 經營의 배경
4. 彌勒寺 창건의 주체
5. 맺음말
요약
무왕의 익산 경영과 미륵사에 관련해 검토하였다. 첫 번째, 무왕을 법왕의 아들로 보았다. 비상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법왕이 서동에게 왕위를 계승한 것을 보면, 법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무왕의 어머니가 정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연고로 서동은 익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파악되며,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결국 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익산천도에 관해서는 천도 이후의 정치체제나 정치세력의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사비와 웅진 두 왕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익산은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로상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익산 경영과 미륵사 건설은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대역사였다. 익산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궁과 사찰을 짓게 된 시기는 무왕 3년 아막산성 전투 패전 이후로 보인다. 무왕은 익산에 궁궐과 미륵사를 창건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새로운 사상이 도래하였음을 전하는 희망의 징표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륵신앙의 전륜성왕 사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격상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미륵사 창건의 주체와 관련해서는 무왕이 그 추진자였다고 생각된다. 미륵사는 오랜 시일이 걸려 완공되었을 것이다. 미륵사 공사는 무왕 3년 이후의 시점에서 무왕이 죽음을 맞이하는 641년 기간 사이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제사리봉안기에서 보이듯, 기해년인 639년은 무왕 40년으로 서탑에 사리를 봉안한 해이다. 사리장엄을 1층 심초석 상면 심주에 한 것으로 본다면, 동탑까지 축성되는 미륵사의 완공은 의자왕대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彌勒寺 大役事와 관련해서 본다면, 미륵사 창건의 발원 주체도 단계를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무왕조를 본다면, 미륵사 창건의 실질적인 주체는 선화공주라기보다는 무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륵사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발원자는 백제 왕후다. 그리고 백제 왕후는 사택씨였다. 무왕대 사택씨는 최고위인 좌평 혹은 대좌평을 역임하고,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중추에 있었다.
따라서 미륵사 창건의 추진 세력으로 선화공주․백제 왕후와 사택씨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익산 경영과 미륵사 창건을 이끌어 낸 무왕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무왕 후기에 벌어진 대신라전에서 백제가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무왕의 익산경영과 미륵사 창건은 미륵불국의 이상을 실현하고 국력을 통합하는데 그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고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