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渡倭한 百濟王族과 河內
3. 河內에 집단 거주한 백제인
4. 백제의 徙民과 倭國
5. 맺음말
요약
곤지와 지진원․주군을 통해 도왜한 백제 왕족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주군은 대화가 아닌 하내 석천 지역을, 곤지는 하내 비조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등 도왜한 백제 왕족은 모두 도왜한 백제계 한인의 집거지역인 하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왜한 백제계 한인이 하내 지역에 집단 거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민의 발산 주체인 백제와 수용주체인 왜 관계에 기인하는 문제이다. 우선 하내 지역에서의 백제인의 활동을 전하는 문헌․고고학적 자료에 기초하면, 5세기대 하내의 개발과 경영이 왜 정권의 현안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왜가 대규모 개발에 필요한 선진적 토목기술을 백제에 요청한 결과, 하내 지역에 대대적인 백제인의 이주가 단행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주군이나 곤지는 백제가 왜와의 동맹관계를 관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왕족외교’의 일환으로 도왜한 뒤, 하내 지역에 집거한 백제인을 관리하는 역할도 담당한 것이다.
다음으로 백제가 행한 열도로의 민 유출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정 지역에 자국의 백성을 안치시키는 이른바 ‘사민’의 한 형태로 이해된다. 그런데 5세기대에 진행되던 백제의 열도에 대한 사민은 6세기 중반 민달조가 되면 제동이 걸린다. 이것은 백제가 축자에 대량의 사민을 통해 이른바 ‘신국’을 건설하겠다는 요청이 거부된 일련의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왜 정권 내부의 권력 관계에 기초해 볼 때 물부씨의 반대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물부씨가 밀려나고 소아씨가 집권하며 백제와의 관계도 다시 긴밀해졌지만, 신국 건설 논의는 다시 입론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국 문제는 왜 조정 내부의 권력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설명되는 면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외의 요인도 고려되어야 한다.
왜 정권은 6세기를 통해 중앙으로 권력을 일원화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백제 왕족이 열도에서 직접적으로 백제인을 통솔하는 행위, 나아가서 백제가 직접적으로 열도에 거주하는 백제계 민들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5세기 하내 지역으로 이주한 백제인 문제는 민을 발산한 주체인 백제와 수렴한 주체인 왜국 사이의 이해관계 합치가 만들어낸 현상이라 이해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