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위덕왕이 왕흥사를 창건한 시기와 목적, 그리고 그 창건배경을 살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왕흥사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5년에 창건된 능사의 건물 배치와 회랑터가 유사하다는 점, 왕흥사의 목탑과 다른 건물 유구가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6세기 후반에 편년되는 기와류가 발견된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비조사 창건 사례가 참고되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왕흥사목탑 조성 연대인 577년 전후의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았다. 왕흥사는 위덕왕의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부여 능사나 미륵사와 함께 왕실과 국가의 안녕과 염원을 기원하는 왕실의 원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흥사는 위덕왕이 죽은 아들의 추복을 위해 창건한 것이지만 부여 능사나 익산의 미륵사 창건과는 다른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왕흥사 창건의 추복 대상이 된 왕지는 위덕왕의 적실 소생으로서 장차 태자로 책복되어 왕위를 계승하는 신임받는 왕자로 보았다. 위덕왕은 이러한 왕자의 뜻밖의 죽음을 계기로 왕족의 결속과 왕권의 기반을 강화시킬 필요성을 가졌다. 이에 위덕왕은 죽은 왕자를 위한 대대적인 추복 행사를 통해 왕권의 건재함을 대내외적으로 표출하는 방법을 추구해 나가게 되었다. 그 방법으로 모색된 것이 사리봉안의식이었는데 이를 통해 왕권의 위상을 높이고 아울러 효사상을 고취시켜 왕권의 기반을 재확립하려는 전기로 삼으려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끝으로 왕흥사는 첫째 위덕왕이 생왕의 후광에서 벗어나 왕권의 독자적 위상을 확보해 나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 불교사상을 이념적 기반으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려는 위덕왕의 호불정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능동적이고 다변적인 대외 관계를 통해 백제국가의 존립과 국제적 위상을 높여 한반도 정세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대외적인 필요성에서 창건된 것으로 보았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