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사리봉안기」의 명문과 내용 분석
III. 「사리봉안기」를 통해 얻게 된 몇 가지 정보
IV. 미륵사 창건 주체에 대한 검토
V. 의자왕대의 沙氏
VI. 맺음말
요약
『사리봉안기』의 분석을 통해 백제는 익산 땅에 거대한 미륵신앙과 관련한 마스터 플랜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용화산 사자사를 필두로 왕궁과 제석사가 차례로 조영되었다. 그 결정체로서 미륵사가 창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륵사는 무왕 당대에 완공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639년 제석사 화재 이후 왕궁평성에 새롭게 사찰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즉 무왕 사후 의자왕이 왕궁평성을 사찰로 전환시켜 선왕의 명복을 기원하는 원찰로 삼는 것은 아니었다. 왕궁펴성 안의 사찰 조성은 제석사 화재 때 기적적으로 남아 있던 불사리 관련 유물을 안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와 더불어 익산에 미륵성지를 구현하려는 마스터 플랜은 전후 시간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위덕왕 말기까지 소급될 여지가 있음을 밝혀둔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는 무왕에서 의자왕대로 넘어가는 권력 관계의 추이를 밝혀주는 관건이기도 했다. 즉 이 무렵 백제의 종교는 물론이고 정치사회적 배경을 고찰하는 데 긴요한 사료로서 비중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었다.
끝으로 서탑 사리호에 봉안된 12顆의 불사리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왕흥사지 사리기에 봉안되었다는 사리는 3매였다. 능사 목탑의 경우는 사리 숫자를 표시하지도 않았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미륵사는 왕실과 왕비족을 비롯한 일반 귀족들이 결집된 힘으로 조성한 대가람임을 짐작하게 한다. 미륵사가 지닌 정치적 위상과 상징성을 다시금 헤아려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