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 성왕대의 대외 정책과 여창
III. 관산성의 지정학적 위치와 조건
IV. 관산성 전투의 시기와 범위
V. 성왕 말년의 대신라 전투와 결과
VI. 맺음말
요약
관산성 전투는 백제가 ‘북진’의 실패와 더불어 한강이남 지역마저도 신라에 빼앗긴 일에서 비롯되었다. 관산성은 금강 상류 지역의 주요한 거점으로, 백제는 관산성을 거쳐 보은의 삼년산성을 석권하고 상주로 진격함으로서 신라가 새롭게 개척한 한강 일대와 경주 지역을 중간에서 차단․양분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므로 그 시작점인 관산성의 향방은 백제나 신라 모두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편 관산성 전투는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단순히 서기 554년 7월에 신라의 승리로 끝나는 단기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일본서기』기록이나 같은 시기에 나타나는 『삼국유사』의 전투 기록등을 연결하여 해석할 경우, 서기 554년 7월~12월에 걸쳐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까지 개입한 ‘國際’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의 관산성 공격은 대내적으로는 북진 주도세력의 정치적 타격을 극복하고, 대외적으로는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에 따른 북진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고려할 경우 단기간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실제 기록상으로도 백제는 여창을 한 축으로 서기 554년 7월에 관산성을 공격하여 구타모라에 요새를 쌓는 등의 성과를 거두게 하는 한편 9월에 관산성 일대와 별개인 진성을 공격하여 빼앗는 등 신라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진성 전투가 벌어진 다음 달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함으로서 전쟁은 삼국이 모두 개입하는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되었고, 이때쯤 신라 또한 본격적으로 관산성 전역에 군대를 투입하여 공방전을 벌임으로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왕이 관산성으로 이동한다는 고급 정보가 누설되어 성왕이 죽임을 당함으로서 전쟁이 종결되어 버렸던 것이다. 백제의 왕은 물론이고 재상급 4명 등 우두머리 집단이 패사한 치명적 패배였다.
그런데 이 전쟁은 이후 한반도의 ‘국제’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전쟁의 당사자인 백제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였으며, 연합 세력인 가야의 신라 병합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쟁 이후 백제는 심각한 내부적인 진통을 앓아야만 했다.
이에 반해 신라는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강성해지면서 함경도 방면과 가야 영역으로 영토를 확충하는 등 한반도의 새로운 강자로 자리매김하였고, 고구려는 신라와의 밀약으로 남쪽 방면으로부터의 압력에서 벗어나 북방 민족의 침입과 새로이 등장한 북중국 세력인 북제, 북주 등에 나름대로 대응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면 관산성 전투는 작게는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겨루는 백제와 신라의 다툼이었지만 크게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선상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라 볼 수도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