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마한의 출현과 소멸에 관한 주요 쟁점들을 문헌기록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마한의 성립에 관해서는 준왕의 남천이 하나의 기준이 되고, 늦어도 기원전 194년에는 마한의 존재가 인정되었다. 준왕의 남천지로는 해양교류와 관련하여 아산만 유역이 주목되었다.
다음은, 마한의 중심세력으로서 소국들을 정치적으로 이끌어 갔던 ‘目支國’의 위치 문제를 살펴보았다. 당시 마한의 중심지를 한강 중류 지역의 서남쪽에서 철기 유적과 유물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 곳에서 찾아보니, 직산이 포함되는 아산만 유역과 익산이 포함되는 금강 유역, 나주가 포함되는 영산강 유역을 거론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목지국 시대에 해당하는 3세기 무렵의 유력 정치 세력은 금강 유역에 있었다고 하겠는데, 이 중에서도 구체적으로는 익산 쪽에 무게가 실린다고 본다.
한편, 마한의 소멸과 관련해서는 경기도 북부에서 벌어진 기리영 전투의 주체문제, 금강 유역 및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이 백제의 팽창에 따라 흡수 통합되는 문제 등이 검토되었다. 정시 연간에 경기도 북부에서 기리영 전투를 주도했던 세력에 대해서는 백제국설, 목지국설, 신분고국설 등이 있는데, 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의 주체가 누구이든 대외적 칭호는 마한을 대표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韓세력이 받은 결정적 피해와는 달리 백제로서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점에서 정시 연간의 전쟁은, 한반도 중부에서 기존의 마한 맹주세력이 쇠퇴하고 백제국이 우위를 점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금강 유역의 마한세력이 소멸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곧 이 지역에 백제가 진출한 시기를 언제로 보느냐 하는 문제였는데 백제 비류왕대설(330년경), 근초고왕대설(369년경), 5세기 전반설 등이 제기되어 있다.
전라남도 지방이 백제에게 병탄되었다는 시기는 보통 근초고왕 24년인 서기 369년으로 비정하지만, 근래 이 설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제기되어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들 신설을 종합해보면, 대략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전반까지는 전라남도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문에 보면, 당시 만주․한반도․일본열도에 존재하고 있던 여러 정치체들의 명칭이나 존재가 나타나지만 마한의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늦어도 광개토왕비가 세워진 414년 이전에는 마한이라는 정치체가 백제의 통치구조 속에 흡수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일본서기』의 신공기를 5세기대로 내려 보아야 한다는 견해의 적극적인 근거도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대 영산강 유역 정치체 문제는 백제의 지방지배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