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일본서기에 가장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왜계백제관료인 ‘達率 日羅’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왜계백제관료가 양국 관계에서 어떠한 필요에 의해 등장했으며, 왜 역사상에서 사라져갔는가 하는 왜계백제관료의 생성과 소멸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검토를 진행하였다.
먼저 왜계백제관료의 등장에 관한 문제이다. 일라가 왜계백제관료가 된 것은 우선 ‘백제에 체류한 韓․倭 混血兒’ 자격으로 왜계백제관료가 된 것이 아니라, 본인이 당대에 臣屬 관계에 있던 大伴씨의 명을 받고 한반도에 도해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도해한 일라는 武人으로서의 개인적인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왜국 내부의 유력 호족 세력인 大伴씨는 물론이고 物部씨와도 多重으로 신속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 백제가 필요로 한 왜 조정의 움직임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족적인 배경을 가진 존재이기도 했다. 결국 일라는 大伴씨의 명을 받고 도해한 뒤, 자신이 가진 개인적인 소양과 族的 배경을 기반으로 하여 백제 조정에 기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백제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까지 왜 조정에서 일라를 소환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백제와 왜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왜국 내부의 문제가 저변에 깔린것이었다. 이러한 내부의 역학 관계는 일라의 국정 자문 내용을 통해 잘 드러난다. 즉 당시 양국 간의 문제로 부각된 백제의 筑紫 지역에 대한 徙民 문제는 실은 양국 관계 이전에 왜국 내부의 物部씨와 蘇我씨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物部씨의 세력권을 침식하고 있던 蘇我씨가 백제의 筑紫 지역 徙民 기획을 지원하자, 物部씨는 백제의 筑紫 徙民이 곧 蘇我씨의 筑紫 지역으로의 진출로 연결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物部씨는 일라를 소환하여 이 문제를 공론화함으로서 백제의 筑紫 사민 자체를 백지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라 관계 기사는 外政이 內政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기존의 논의와 부합되는 전형적인 사례의 하나라 여겨진다.
셋째는 일라 이후에 왜계백제관료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일라를 비롯한 왜계백제관료는 大伴·物部씨 등 畿內․外의 다양한 호족이 만들어낸 존재였다. 따라서 열도 내부의 통합과 권력의 집중을 지향하던 蘇我씨로 대표되는 왜 왕권은 이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을 기용하는 입장에 있던 백제 입장에서도 소환된 이후 일라의 백제에 반하는 행동은 왜계백제관료 자체의 효용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敏達朝 이후의 정국은 蘇我씨에 의해 주도되었기에, 백제의 對倭 정책도 蘇我씨의 의향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왜계백제관료는 양국 모두에서 존속시켜야 할 의미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고, 이로 인해 史上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