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백제 始祖에 대한 기록과 그 認識
1) 백제 始祖에 대한 기록
2) 백제 당시의 始祖 認識
2. 온조 설화의 검토와 그 생성 배경
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의 검토
2) 仇台와 溫祚의 동일 여부 검토
3. 온조 설화의 출현 시기와 그 배경
맺음말
요약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온조 설화는 곧 백제 개국설화로서 의심 없이 수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혹은 백제 때부터의 所傳이 아니겠냐는 믿음을 가져 왔지만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제기가 없었다. 더욱이 온조 설화는 당시에 흔히 확인되듯이 시조의 출생과 관련한 신화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과 더불어 동일한 사서에 게재된 沸流 설화와 충돌하고 있다. 그럼에도 비류 설화와의 상호 비교·검토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백제 왕실의 전승에 따르면 都慕大王 설화에 보듯이 日神의 感應을 받아 출생했다는 說이 원형이 된다. 이 전승은 백제 말기까지 존속한 관계로 일본의 史書인 『續日本紀』에 수록되었다고 하겠다. 온조 설화가 설령 개국 이래 혹은 7세기대에 생성되거나 채택되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일단 이는 도모대왕 설화와 배치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도모대왕은 동명왕과 동일한 神格으로서, 백제 성왕대에 국호를 `南扶餘`로 고치는 등 부여로의 정통성을 천명하는 상황에서 격상된 신격으로 보인다. 이와는 별도로 廟祠를 갖추고 있었던 仇台는 온조 설화와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신격이지만 비류 설화와는 연결점이 어느 정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백제 全時期에 걸쳐 왕실은 부여로부터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서 속에서 고구려에서 기원했다는 온조 설화는 비집고 설 틈이 없었다고 보는 게 정직한 해석인 것이다.
온조 설화는 백제 멸망 이후 어느 때 생성되었다고 보는 게 순리적인 해석이 아닐까 싶다. 고려 왕조는 대통합을 위한 명제로서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설정하면서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들로 접속시켰다고 본다. 백제 당시에 존재할 수 없었던 고구려계의 온조 설화가 생성된 배경은 이같은 정치적 배경에서 출현한 것으로 해석해 보았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