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대에 임명된 솔계 관등 소지자는 족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고 ‘원백제인’으로 부를 수 있는 지배자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이후 근초고왕대(346~375)를 전후하여 ‘좌평’이 2인으로 늘어나면서 회의체에서 정치적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달솔과의 위상 차이가 뚜렷해 졌고, 은솔 이하의 솔계 관등도 2~3개로 분화되었으며, 덕계 관등도 등장하게 되었다. ‘좌평’은 이러한 관등제의 구조 속에서 왕․달솔과 함께 최고결정기관인 회의체를 구성하고, 왕과 귀족의 매개자로서 존재하였다. 당시의 정치구조는 회의체가 일상적인 정무는 물론 군국정사까지도 결정하였다. 회의체에서 정무가 결정된 후에는 회의체 구성원의 책임 하에 특정 관인에게 행정 실무를 맡겨 처리하였다. 전지왕대에는 좌평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여 달솔과 명칭상은 물론 계층상의 구분까지 이루어지고, 기존의 회의체도 상․중․하좌평의 좌평회의와 솔계 관등까지도 참여하는 제솔회의로 분리되었다.
무령왕대를 전후하여 내솔의 설치와 덕계 관등의 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관등제의 정비는 관사를 설치하여 조직적인 행정체계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무령왕대부터 7세기 초반까지 존재한 5명의 좌평은 특정한 직무 없이 국가대사를 결정하는 회의체의 구성원이었다. 이러한 좌평들의 회의체는 상좌평의 등장 이후에 정원이 3명이었다가 5명으로 늘어난 것이었고, 사비시대의 정사암회의에서 구체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6좌평-18부’의 의사결정기구는 좌평회의를 대체하여 수당의 제도에서 재상회의에 비견되는 것이, 국가대사를 논의하던 제솔회의를 대체하여 군신회의에 비견되는 것이 등장하였다.
결국 고이왕대에는 처음으로 일원적인 관등체계가 등장하면서 왕과 ‘좌평’-'달솔 중심의 회의체가 각 집단의 의견을 수렴하는 합의적인 정치구조를 이루었고, 대왕의 등장으로 부가 해체되고 각 귀족가문이 분립하면서 솔계 관등의 분화가 가속화되는 동시에 좌평회의와 제솔회의가 분화되어 귀족회의체로서 각각 역할을 달리하였으며, 전 지역의 일원적 지배가 시도되면서 덕계 관등의 분화가 가속화되어 22부사체제의 기반이 되는 동시에 이전의 좌평회의가 정사암회의라는 의사결정구조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7세기 당제의 영향 아래에 정사암회의-제솔회의와 같은 귀족회의체가 재상회의-군신회의와 같은 상대적으로 왕권의 영향력이 강화된 것으로 재편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