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태자제의 도입을 위한 전제 조건과 백제사
III. 태자제의 도입과 정착
IV. 맺음말-제도적 정착의 미약 원인
요약
백제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척도이자 왕위계승자를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태자제의 수용이 매우 늦었다. 백제사를 보면 정치체제의 기반 성숙과 왕계의 안정이 이루어진 근초고왕대 이후 태자 책봉이 가능했다. 결국 제17대 아신왕이 형제상속과 부자상속이 교차되며 나타난 왕위 쟁탈의 혼란을 극복하고, 원자 전지를 태자로 책봉하여 본 제도가 도입되었다. 특히 아신왕의 사후 왕제 설례가 계위를 도모했지만 전지는 국인의 지지로 즉위하였다. 이는 전지가 태자 책봉을 통한 공식적인 왕위 계승권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후 제22대 문주왕이 태자 책봉을 실시했다. 문주왕의 선왕인 개로왕대에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만한 좌현왕 곤지가 있었지만 곤지의 형이자 상좌평인 문주가 즉위하였다. 즉위시 문주에게는 10세 초반의 왕자 삼근이 있었고 좌현왕인 곤지도 있었다. 문주는 삼근과 곤지 사이에 왕의 계위를 명확히 할 필요성이 있어 삼근을 태자로 책봉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지만 해구에 의해 시해된다. 이후 삼근은 국인들의 비호를 받아 즉위하였다. 당시 국인들이 보여준 비호의 원천도 삼근이 책봉을 통한 태자의 신분을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제30대 무왕이 태자 책봉을 실시했다. 무왕은 재위 후반기인 33년에 이르러 40대 초중반의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고구려나 신라왕의 행적과 비교하면, 유난히 책봉시기가 늦고 책봉된 왕자의 연령이 많은 편으로 태자 책봉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무왕은 태자궁을 설치하면서까지 태자제의 정착을 도모했다. 그리고 태자로 즉위한 의자왕은 재위 초반 3남 융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의자왕 말기 태자를 관칭한 효의 존재와 더불어 현재 학계에서 태자 다수설 내지 교체설이 제기되는 것처럼 태자제는 안정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결국 『삼국사기』에는 31명의 왕 중 6명만이 태자 책봉을 했다는 기록이 나올 뿐인데, 이는 백제 왕실이 거듭된 전쟁과 정란에서 비롯된 피해 속에 왕권이 미약하여 근친이나 유력자 위주의 정치 운영을 도모한 결과였다. 특히 개로왕대 좌현왕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인물이 지닌 정치적 위상은 태자 책봉에 장애가 되었다. 그러므로 백제는 직계 위주의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담보하는 태자제의 정착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