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취리산 맹약과 박도유
III. 박도유 모반사건과 수세의 관계
IV. 맺음말
요약
웅진도독부의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은 665년 就利山에서 두 세력 사이의 우호를 다지고, 경계를 획정하는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취리산 맹약에 포함된 두 세력의 혼인결속을 이행한 이는 신라의 漢城都督朴都儒와 웅진도독부 소속의 백제여인으로 짐작되었다.
웅진도독부와 신라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정벌이 끝난 이후였다. 이들 사이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던 신라의 한성도독 박도유가 신라를 배반하려다가 발각되어 주살되었기 때문이다. 박도유가 신라를 배반한 행위 즉 모반사건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答薛仁貴書”에서는 66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668년 고구려 정벌전이 끝난 후 신라의 정세를 살펴볼 때 이 시기에 박도유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신라본기에는 박도유 사건과 비슷한 사건으로 670년 漢城州摠管藪世의 모반사건을 기록하였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별개의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같은 사건으로 볼 여지가 있었다. 수세는 670년 한성주총관으로 재임 중 모반사건을 일으켰으며, 그의 관직, 군사적 배경 또한 박도유와 같았기 때문이다.
신라 지도부가 670년 고구려의 부흥군 세력과 협력하여 당의 군대를 공격한 일은 박도유를 혼란에 빠뜨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박도유는 웅진도독부의 회유와 당과 밀착된 그의 입장에 따라 당을 선택하였다. 신라 문무왕도 당·웅진도독부와 밀착되어 있던 그를 기습하여 제거했던 것이다.
670년에 발생했을 것으로 파악되는 박도유의 배반사건을 “답설인귀서”에서는 668년의 사실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신라 측에서 668년 이후 웅진도독부와의 관계가 무력충돌 국면으로 접어든 책임이 웅진도독부에 있었음을 당의 장수 설인귀에게 설명하고자 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웅진도독부와 신라는 취리산 맹약이 파기된 이후에도 명분상 우호 유지를 위한 후속 조치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웅진도독부와 신라는 다시 웅진도독부의 禰軍과 신라의 金儒敦을 볼모로 서로 교환하여 형식적이나마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결국 이 관계는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사비에 所夫里州를 설치하면서 끝이 났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