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연구동향과 종래 논의의 문제점 검토
3. ‘양단책’과 ‘화친설’에 대한 관련 사료의 분석과 검토
(1) ‘양단책’의 의미
(2) 643년 고구려와 백제의 ‘화친’ 관련 사료 분석
4. 6세기 말∼7세기 양국관계의 단계적 변천 과정
(1) 접근 단계
(2) 화친 단계
(3) 연합군 결성 단계
5. 맺음말
요약
종래의 이해와 달리 6세기 말∼7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접근→화친→연합군 결성’이라는 단계적 변천 과정을 걸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본 글은 이를 고려하며, 양국 관계의 단계적 변화를 주도한 주체와 그 내용, 성격, 의미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611년 백제 무왕은 고구려와 수 사이에서 양단책을 취했다. 종래 ‘양단’의 의미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있었으나, ‘백제의 안위’에 역점을 두고 장차 이루어질 수의 고구려 침입에 대한 기민한 대응과 정보 수집에 열중했던 무왕은 위덕왕 대의 외교적 경험을 고려하며 고구려에 접근했다. 이때 무왕은 고구려로부터 백제 북변의 안위를 보장 받아 대신라공세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고자 했으며, 고구려는 수의 침입이 곧 예상되는 조건 속에서 무왕의 제안을 수용해 양국은 일시적으로나마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뒷날 양국의 화친 및 연합군 결성의 토대로 작용하였다.
한편, 643년 백제 의자왕은 고구려에 화친을 제의했고, 고구려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양국 간에 상호 전략적 화친관계가 성립됐다. 이는 신라와의 적대관계 속에서 고구려와의 화친이 필요했던 백제 측의 입장과, 과거 역사적 경험을 기반으로 ‘외교적 선택’을 했던 고구려의 입장이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 간 화친의 내용은 백제의 대신라공세를 고구려가 묵인하는 대신, 백제는 예상되는 당의 고구려 침입이 실현될 경우 고구려의 남변을 교란하지 않거나 최소한 당을 활용해 고구려를 견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어 655년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는 연합군을 결성해 대대적인 신라공세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공세는 주로 당시 고구려의 대외전략과 그 필요성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여기에 대당외교를 중단한 속에서 답보 상태에 빠져있던 대신라공세를 다시 강화해야 할 백제의 필요성이 맞아떨어져 양국의 연합군 결성이 마침내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