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 위덕왕대 정책방향과 지지세력
1) 위덕왕대 대외정책의 변화와 의미
2) 위덕왕계 세력의 동향
2. 혜왕계 세력의 대두와 성장
1) 혜왕의 도일(渡日)과 의미
2) 익산세력과 결합을 통한 혜왕계 세력의 성장
맺음말
요약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를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로서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즉위 초에는 정치적 기반이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재위기간 동안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대외적으로는 기존에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왜와의 관계를 대신하여 대중국외교 교섭을 통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한편, 신라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부터 유지해왔던 신라에 대한 적대적 노선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위덕왕대 정책이 가능했던 것은 그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덕왕계 세력은 위덕왕 즉위 전부터 그와 함께 관산성 전투를 치렀던 이들을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관산성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위덕왕 즉위 초에는 그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위덕왕은 그 대안으로써 왕실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해 나가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것이다. 위덕왕대 주요 교섭루트라고 할 수 있는 중국과의 교섭을 담당했던 이들 역시 위덕왕계 세력의 일부를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위덕왕 2년 왜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돌아오는 혜는 위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는 기록 외에는 이렇다 할 흔적을 찾을 수는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가 주목되는 이유는 이후 지속되는 왕계가 그에게서 다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위덕왕대 혜의 정치적 성장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즉위와 왕계의 형성을 생각하게 한다.
혜의 등장은 대왜 교섭을 통해서였다. 그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청병사(請兵使)의 임무를 띠고 왜에 파견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당시 일본의 중심세력 중 하나인 소아씨(蘇我氏) 세력과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귀국하면서 왜계세력과 함께 돌아오면서 위덕왕대 소원했던 왜와의 교섭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국내에서는 6세기 중반 이후 백제 중앙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익산세력과 통혼 관계를 맺음으로써 혜왕계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관계의 배경에는 위덕왕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정책 노선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와의 관계에 상대적으로 미온적이었던 위덕왕과는 달리 왜는 혜를 통해 백제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혜가 귀국할 당시 함께 왔던 왜병들 역시 초기에는 백제 왕실의 지원병이었을 것이나 점차 혜의 사병적 성격으로 변화해 갔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편으로 신라에 대한 적대적 노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위덕왕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라와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혜의 상황이 국내 기반인 익산세력과의 관계를 맺는데도 역할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혜왕계의 등장은 성왕 이후 사비시대 백제의 중흥을 이끈 무왕의 권력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위덕왕대 등장하여 성장하였던 혜왕계 세력은 이후 무왕의 권력기반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