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과 管山城 戰鬪의 前兆
Ⅲ. 管山城 戰鬪의 발발과 추이
Ⅳ. 맺음말
요약
신라는 6세기 중반에 들어서 기존의 수세적 방어체계를 공세적 공격루트로 전환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압박해 나갔다. 신라는 550년에 고구려와 백제가 장악하고 있던 道薩城[괴산군 증평]과 金峴城[연기군 전의]을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의 國原[충주]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신라 眞興王(540~576)이 이듬해 娘城[청주]으로 巡狩를 온 것은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은 사후조처이자 한강 중상류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신라의 국원 진출은 추풍령·화령로와 죽령로의 양쪽에서 협공하는 전략 하에 550년 3월~551년 3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신라는 국원을 차지한 후 곧바로 백제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략하였다. 고구려는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北齊와 돌궐의 압박이 심해지는 위기 속에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말았다. 신라가 진출한 한강 중상류의 10군은 朔州 관내의 ①奈城郡[奈生郡], ②奈隄郡[奈吐郡], ③北原[平原郡], ④嘉平郡[斤平郡], ⑤朔州[牛頭州], ⑥狼川郡[猩川郡], ⑦楊麓郡[楊口郡], ⑧益城郡[母城郡], ⑨大楊郡[大楊菅郡], ⑩連城郡[各連城郡]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의 6군은 임진강 이남의 ①漢陽郡[北漢山郡: 平壤], ②來蘇郡[買省郡], ③交河郡[泉井口縣], ④堅城郡[臂城郡], ⑤鐵城郡[鐵圓郡], ⑥富平郡[夫如郡]으로 추정하였다.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유역은 6군에다가 한강 이남의 한성 일대를 포함해 경기 남부 일대를 망라했다.
백제가 차지했던 한강 하류 유역은 553년 7월에 신라에게 귀속되었지만 이에 대한 백제의 대응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551년 후반~552년 전반에 고구려와 신라 간에 맺어진 “麗·羅密約”이 백제로 하여금 고구려의 군사개입을 우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聖王(523~554)은 신라에 반격을 가할 시간을 벌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나제동맹을 유지하면서 은밀하게 倭에 사신을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小妃로 보내는 위장전술을 사용해 신라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하면서 관산성 전투를 준비하였다.
554년 5월에 이르러 倭로부터 군사 1천 명 등을 지원받은 백제는 가야군까지 규합하여 554년 7월에 신라로 쳐들어갔다. 전투는 餘昌이 총책임을 맡아 주도하였다. 백제는 먼저 사비에서 관산성으로 나아가는 요충지에 있었던 珍城[금산군 진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의 승세는 관산성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12월 9일에 관산성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성왕이 여창을 위로하고자 군사 50명만을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나아갔다. 이 무렵 신라는 관산성 전투의 패전을 만회하고자 新州 軍主 金武力을 필두로 전군을 동원하였다. 신라는 성왕이 관산성으로 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여 관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성왕은 결국 신라의 복병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성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해 관산성 전투의 전세는 급속히 신라에게 기울어 갔다. 마침내 신라는 관산성을 포위하였고, 여창은 이에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와 퇴각하였다. 결국 관산성 전투는 성왕과 좌평 4명을 잃고 백제군 3만 여 명이 전사하는 백제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