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무령왕의 출자 문제
III. 문주왕과 삼근왕의 계보
IV. 동성왕과 무령왕의 즉위
V. 백제의 왕위계승과 왜
VI. 맺음말
요약
本考는 사료상에 혼선을 보이고 있는 百濟 웅진시대의 왕위계승 관계를 밝힘으로써 백제사 이면에 나타난 역사적 사실과 백제의 對倭관계에 대해 재조명해보고자 하였다. 461년(462년) 昆支는 蓋鹵王의 倭國과의 화친 정책에 따라 倭國의 여인과 婚姻을 맺기 위해 파견되고 이 과정에서 庶子인 武寧王이 태어나게 된다. 475년 고구려의 침입으로 蓋鹵王이 피살되는 상황에서 百濟는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고 文周王이 즉위하게 된다. 文周王은 蓋鹵王의 母弟(어머니의 동생)로서 당시 왕위계승권자인 昆支가 왜국에 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 대치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즉위하게 된다. 따라서 文周王과 三斤王(文斤王)을 거치는 동안 일시적으로 백제왕계에 변화를 보이지만, 三斤王의 사망으로 문주의 계통도 단절되는 상황에 처한다. 이때 倭國에 있던 東城王이 즉위하는데, 東城王은 昆支가 倭國과 혼인을 위한 화친으로 파견되었을 때 倭國왕실의 여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백제왕계의 적통계열인 昆支의 아들 중에서도 嫡子였기에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東城王은 말년 신하들과의 갈등 및 민심 이반이 일어나 왕 23년 피살당하고 武寧王이 등극하게 된다. 武寧王은 昆支의 庶子로서 왕위계승권자의 위치에 있지 못했지만, 東城王 23년의 정변에 개입함으로써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처럼 웅진시대 백제왕에 대한 왕통보가 각 사료마다 차이를 보여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百濟 왕계의 단절과 百濟, 倭 왕실간에 있었던 婚姻에 의한 화친 정책의 결과 촉발되었던 것이다. 특히 웅진시대에 나타나는 왕위계승의 상황은 5세기초 아신왕 이후에 나타나는 百濟의 왕위계승과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