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오합사가 보령지역에 조성된 배경과 목적, 그리고 이를 지원한 단월세력의 문제, 오합사의 정치적 성격 등을 당시의 정국상황과 관련하여 검토한 것이다.
<숭암산성주사사적>에 따르면, 오합사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목적의 호국사찰로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시기는 <숭암산성주사사적>의 기록을 통해 보면 혜왕대 초창되어 무왕 17년에 완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위덕왕대 초창되었던 왕흥사를 법왕이 호국사찰로 중창하였다는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 오합사를 법왕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호국사찰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호국사찰을 조영하였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다. 그리고 오합사의 창건 주체는 혜왕의 왕위계승을 지지했던 사씨세력으로 추정된다. 동성왕 17년(495) 남제에 작위를 요청함에 있어 사법명이 매라왕에 제수된 바가 있는데, 매라는 궁남지에서 출토된 목간의 「매라성법리원(邁羅城法利源)」의 매라와 동일 지명일 가능성이 높다. 매라는 보령지역으로 추정되며, 이들 지역은 사씨의 식읍내지는 세력권에 편제되었던 곳이었다. 그로 인해 사씨가 오합사 창건의 단월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의자왕 15년에 일어난 괴변은 오합사의 정치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오합사의 괴변은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와 『일본서기』등에도 기록되고 있다. 이는 오합사의 괴변이 그만큼 특별한 정치적 의미와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의자왕 19년에 일어난 태자궁 및 상좌평과 관련된 괴변이 사씨세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점을 통해서 살펴볼 때 오합사의 괴변도 사씨세력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의자왕 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던 융을 축출하고 태자에 오른 효는 사씨출신의 왕비인 군대부인의 소생이었으며, 상좌평 역시 사씨세력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합사의 괴변을 시작으로 일어난 태자궁과 상좌평 관련 괴변은 모두 사씨세력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백제말기의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 오합사의 창건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씨세력이었으며, 창건 주체도 사씨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오합사가 혜왕과 법왕의 단명에도 불구하고 무왕대 완공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사씨세력의 재정적 지원에 의해 가능하였으며, 오합사는 사씨의 원찰로서 기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