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융이 唐에 들어간 초기에는 의자왕의 장례를 치르느라 대외적인 활동이 거의 없었다. 부여융이 백제 고토로 돌아온 시기는 663년 7월이었고, 부흥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고 설득시켜 당군에 투항하도록 하였다.
부여융은 본인이 의자왕의 뒤를 이을 백제의 태자였다는 점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백제부흥군을 진압한 뒤에 부여융은 당의 백제 고토 지배와 고구려 정벌에 이용되었다. 부여융은 웅진도독부에서 도위와 도독으로서 백제유민들을 다스리고 664년 2월 웅령 회맹과 665년 8월 취리산 회맹을 통해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666년 1월 당 고종의 태산 봉선에 참여하였고, 백제군공의 작위를 받았다. 666년 2월2일에는 曲阜의 孔子廟에 가서 황제를 대신해 제사를 지냈다. 666년 5월경에 웅진도독부로 돌아와 백제유민 按撫와 더불어 당의 고구려 원정에 필요한 군수품 지원 준비와 倭에 대한 외교적 조치를 통해 왜와 고구려가 연결되는 것을 막는 일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668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668년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 부여융은 웅진도독부를 통해 신라를 견제하고자했지만, 신라에게 밀려 백제 고토의 대부분을 내주었고, 간신히 웅진도독부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당으로 들어간 것은 675년 무렵이었다. 부여융이 백제 고토를 떠나면서 웅진도독부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676년 2월 고구려 고토의 건안 고성에서 웅진도독부는 부활되었고, 이곳에서 부여융은 당으로 옮겨간 백제 유민들을 다스리다가 682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