抱川은 자연 지리적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적당한 조건을 갖추어 오랜 전통의 先史文化를 갖고 있다. 또한 포천은 한반도의 동북과 서북, 동남과 서남을 각각 연결하는 교차점에 해당하기 때문에, 신석기시대 이래로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한강유역 선사문화의 전초지 역할을 하였다. 초기철기시대의 永松里․自作里 유적 등은 대규모 聚落의 존재를 전하며, 이들은 邑落의 형성과 관계 깊어 포천 일대에서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토착적인 정치집단의 계기적 발전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곧 포천지역은 북방의 철기문화 등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에 자리하여 우리나라 초기국가의 성장과정과 맥을 같이하였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포천은 漢灘江과 永平川 일대의 집단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결집하여 馬韓 小國의 하나로 성장해갔다. 『三國志』 韓傳의 牟水國과 桑外國은 포천과 관계가 있는 소국들로, 마한북부의 백제국과 그 주변 소국들로 상정되는 ‘近郡諸國’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2세기 중반이후 마한북부의 여러 소국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伯濟國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연맹체를 이끌어 갔다. 포천지역의 소국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백제국의 영향권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특히 포천은 百濟 古王대 중국군현과의 岐離營 전투에 참여하면서 백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포천은 중국 군현지역에서 수도 漢城으로 통하는 군사적 통로에 위치하여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되었다.
4세기 들어 본격화된 고구려의 남진으로 백제의 북방에 위치한 抱川․漣川지역은 고구려와 대치하는 접전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포천은 철원방면에서 광나루를 거쳐 河南慰禮城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어,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내는 군사적 요충지로 부각되었으며, 古毛里山城과 半月山城 등 지역 내에 산재한 山城의 존재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다가 광개토왕의 南征 이후 포천은 6세기 중반 백제와 신라가 공동작전으로 한강유역을 빼앗을 때까지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이 지역의 ‘馬忽’이라는 지명은 이 시기에 대두하였다.
신라는 7세기 초반부터 漢山州를 두어 이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를 도모하였다. 당시 州가 군사거점의 성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한산주에 편제되었던 포천은 철원이나 연천방면에서 남하하는 고구려를 최북단에서 방어하는 군사적 거점이 되었다. 7세기 후반에 신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남하하는 唐軍을 買肖城에서 크게 이겨 對唐전쟁의 결정적 승기를 잡았는데, 大田里山城은 그 위치와 입지로 보아 매초성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 뒤에 9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신라의 예성강 이북지역에 대한 영토개발에서 포천은 북방의 전초기지로 이용되었으므로, 그 전략적 기능은 신라통일 이후에도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