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戶口’ 관련 목간과 百濟戶籍의 복원
Ⅲ. ‘郡-城’ 행정 관련 목간과 豆肹城의 位相
Ⅳ. 맺음말
요약
복암리 목간은 백제의 중앙 도성이 아닌 지방사회에서 발굴된 최초의 사례이며, 목간의 묵서에도 종래의 문헌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백제의 戶口파악방식, 농업경영(量田 및 단위생산량), 그리고 "郡-城"의 행정체계에 관한 매우 획기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어, 그 의의가 자못 크다. 복암리 목간에 대한 본고의 분석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암리 <목간11>에 기록된 "庚午年"은 610년으로 추정되며, 내용상 호구파악이나 군-성의 행정 관련 문서목간들이 대부분이어서, 복암리 목간은 7세기 초에 백제 지방관부가 작성한 목간으로 이해된다.
둘째, 복암리 목간을 통해 백제의 "戶籍"과 기층사회의 존재양태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목간2>와 <목간5>를 통해 백제 戶籍의 서식도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백제의 戶는 복합세대로 구성되었고, 세대별로 독립 기술되었다. 그 각각에 中口, 小口 등 그 예하 子女가 남녀 구별 없이 나이순으로 기술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는 현존하는 西魏의 大統 13년(A.D.547) 戶籍이나 日本의 西海道戶籍(A.D.702)과 서식이 매우 유사하다. 결국 西魏 계열의 서해도호 적기재양식은 7세기말 망명한 백제계 지식인들에 의해 고대일본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셋째, 복암리 목간을 통해 백제의 郡-城 지방행정체계를 검토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목간4>의 "郡佐"나 <목간10>의 "郡得分"처럼, 복암리 목간에는 백제의 "군-성" 행정과 관련된 목간이 여러 개 확인된다. 또 "軍那"가 기록된 荷札과 "半那人"들의 역역편성 관련 문서목간 등이 확인되고 있어, 목간이 출토된 복암리 지역, 즉 豆힐城이 7세기 초 당시 군나, 반나 등을 예하에 거느린 郡置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복암리 목간을 전후한 시기 영산강 유역 지역권력의 변화과정을 추론하면 다음과 같다.
영산강 유역은 반남고분군으로 상징되듯이 전통적으로 "半那"가 지역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백제는 6세기 이후 영산강유역으로 세력을 뻗치면서, 반나의 기존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현재 다시면 복암리 일대인 "豆肹" 지역의 세력을 후원 하였다. 복암리고분군은 이를 상징한다. 이후 백제의 중앙집권제 하에서 豆肹城은 郡으로써 영산강 유역의 半那, 軍那, 布賢(發羅) 등의 각 城을 관할하였다. 이러한 郡-城의 행정관계는 唐이 帶方州를 설치하였던 도독부 시절에도 지속되었다.
한편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영산강 유역의 기존 권력구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백제 때 눌려 지냈던 반나 지역을 군으로 승격하고, 두힐은 현으로 강등하여 발라군의 예하로 편성하였다. 이때 두힐이 기존에 관할하던 군나도 분리하여 무안군으로 소속시켰다. 이를 통해 백제 때 두힐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영산강 유역의 지역권력구조는 신라에 의해 완벽히 해체되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