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사비성 천도를 위한 제반 작업
III. 都城의 조성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IV. 맺음말
요약
백제는 538년에 사비성으로 천도하였다. 사비성 천도는 475년에 한성 함락으로 인한 63년간의 과도기적인 웅진성 도읍기를 청산하고 雄飛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새 國都의 시대를 맞았음을 뜻한다. 이러한 사비성 도읍기의 전개와 관련해 그간의 쟁점을 중심으로 크게 2개의 주제로 고찰해 보고자 했다.
제1부는 사비성 천도와 관련한 제반 준비 작업을 살피는 일이다. 제2부는 都城의 조성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를 검증해 보고자 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최근의 발굴 성과에 힘입어 ‘定林寺’의 조성 시기와 伽藍이 지닌 성격에 대한 재검토를 한 것이다. 물론 이는 그에 앞서 前提된 사비도성의 조성 계획과 遷都목적을 구명하기 위한 후속 작업의 일환이었다. 사비성 천도에 주도적으로 협조한 세력은 사택씨가 아니라 木氏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사비도성의 구획과 관련해 쟁점이 되고 있는 게 西쪽 羅城의 존재 여부였다. 한성 도읍기부터 홍수의 범람으로 인한 제방 축조의 경험을 지닌 국가가 백제였다. 백마강에 접할 수밖에 없는 西쪽 羅城은 제방의 역할과 더불어 도성의 완결성을 가져다 주는 사안이었기에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 南北자오선상에 一列로 부처 관련 시설이 배치된 '정림사지' 가람 구조는 '王이 곧 부처이다'라는 사상과 관련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부처와 동격의 위상을 확보하고자 한 백제 왕을 정점으로 한 강력한 왕권의 표상이기도 했다.
최근의 발굴 성과에 따르면 ‘정림사지’는 7세기대에 창건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비도성 기획과 관련해 조성된 사찰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정림사지’의 寺刹이름은 백제나 고려시대 때도 定林寺라는 사찰은 아닌 것으로 구명되었다.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로 남겨졌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