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고구려의 대왜외교와 양국의 우호
III. 고구려의 대왜외교와 백제
IV. 고구려와 왜 그리고 백제의 상호전략
V. 맺음말
요약
570년 이래 고구려는 對倭外交를 통해 왜와 우호하여 新羅를 견제해 나갔다. 이 글은 이러한 고구려의 대왜외교와 마주하게 된 왜국 조정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양국의 우호로 왜국의 대외관계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짚어봄으로써 고구려와 연동되었던 각국의 대외전략을 살핀 것이다.
고구려의 대왜외교가 전개되기 전까지, 왜국은 동북아시아 국제관계에서 바깥에 놓여있던 ‘孤島’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던 왜국이 고립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는 고구려가 대왜외교를 개시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고구려가 접근해 왔다는 사실을 내세워 왜국은 新羅에게 관계 再開를 요구할 수 있었고,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가 대왜외교를 재개하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고구려의 대왜외교로 인해 百濟는 왜국의 대외관계에서 고구려와 경쟁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대왜외교는 574년의 사절 파견을 끝으로 약 20여 년 간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95년 高句麗僧慧慈의 渡倭는 고구려와 왜국 간의 긴밀한 관계를 토대로 성사된 것이어서, 기록에 보이질 않는 이 20여 년의 기간이야말로 양국이 우호하게 되는데 필요한 교류가 있었던 시기였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의 접근에 대해 왜국 조정이 호응하게 된 배경은 고구려의 대왜외교를 이용하여 교섭 상대국을 압박하고 왜의 의지를 관철시킨다는 왜국 조정의 대외전략에 있었음을 밝혔다.
수의 등장에 뒤이어, 동북아시아세계를 뒤흔든 사건은 수와 고구려의 대결이었다. 이러한 긴박한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지금까지의 이해는 왜가 고구려의 대외전략에 호응하고 있었다고 보아왔다. 608년 왜가수에 보낸 國書는 고구려 침공을 계획하고 있던 수의 주의를 왜로 돌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隋煬帝는 실상을 살피기 위해 사자를 보냈을 뿐, 후속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희생양이 되었을 법한 왜국의 遣隋使일행조차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왜국의 對隋外交를 고구려의 대외전략과 연관지어 살핀 이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즉 왜의 대수외교는 수와의 교류를 필요로 했던 왜국 조정의 독자적 판단과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구려의 대왜외교를 내세워 교섭 상대국을 압박하고 왜의 의지를 관철시킨다는 前시기의 대외전략이 對隋關係에서도 적용되고 있었음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