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위진남조 장군제의 성립과 변천
1. 삼국·서진시대의 장군과 주군 영병의 추이
2. 동진·남조시대의 장군호 확산 양상
III. 위진남조 정권의 군벌적 성격
IV. 장군제의 국제적 확장과 '영동대장군'
V. 맺음말
요약
後漢末이래로 魏晉南朝를 거치면서 발달한 將軍制度는 분열과 혼란의 시대상을 집약적으로 대변해준다. 이 시대 역대 왕조는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將軍號의 수는 폭증을 거듭하였으며, 그 결과 관직체계에서도 수많은 장군과 그 軍府의 屬官職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군사 정변을 통해 대권을 장악한 장군이 국정을 전단하다가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사례가 수십 년마다 되풀이된 것은, 장군제의 전개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였다.
지방에서도 장군호의 폭증에 비례하여 州와 郡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그 행정이 군부에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都督·將軍의 군사관할 범위 안에서 州·郡은 그 일부로 예속되었으며, 군부의 속관들이 郡縣의 守令을 겸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중앙과 지방이 장군의 군사관할권에 의한 統屬체계로 새롭게 개편되면서, 국제관계에도 기존의 爵制的질서를 벗어나 장군호를 매개로 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었다. 東晉末이후 南朝에서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封爵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장군호를 주변국 군주에게 除授함으로써, 새로이 군사관할권에 입각한 統屬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주변국 군주의 사절이 그 군부의 속관 직함(長史·司馬·參軍)을 지니고 중국에 使行한 것은, 새로이 형성된 관계의 틀이 국제관계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측의 이러한 의도가 실제로 관철되었는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宋代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안정을 회복하는 단계에 들어섬으로써 중국과 정치 문화적 교류를 희망하는 주변국에 장군제의 수용이 점차 국제적인 관례로 굳어져갔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관례는 비단 중국과 주변국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주변국들 사이에서도 적용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6세기에 百濟가 倭에 보낸 사절의 직함으로 장군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武寧王이 실제로 국내에서 寧東大將軍의 軍府를 개설 운용했는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의 묘지명에서 보듯 장군호를 공식적인 직함으로 사용한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무령왕은 중국과의 교섭에서도 장군호를 포함한 공식 직함을 칭하고, 그가 보낸 외교사절도 당연히 군부 고유의 직함(즉 長史․司馬․參軍)을 사용했을 것이다. 다만 干支표기나 “崩”의 용례는 무령왕이 백제에서 배타적으로 군림하는 존재였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즉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은 당시 국제 관례를 충실히 반영한 직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