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百濟에 있어서 ‘周體’的 정치이념의 形跡
Ⅲ. ‘周體’的 정치이념의 標榜 시기를 追求함
Ⅳ. 맺는말
요약
백제의 정치제도와 典章․文物은 자료의 극심한 羊족으로 아직도 解明되지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필자는 佐平制를 端緒로 하여 백제의 중앙 官府조직, 그리고 天神과 五帝의 神에 대한 국가적 제사의례를 검토해 본 결과, 백제가 國制의 範을《周禮》에서 취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周禮》에 입각한 정치이념을 표방했었음을 대략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채택 시기를 追求한 결과 一見 聖王 때가 유력한듯이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 이전의 熊津時代로까지 소급하여 생각할 수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백제의 ‘周禮勺 정치이념의 채택문제와 관련하여 역시 해명하기 어려운 점은 사상적 淵源을 어디서 求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周禮녜 정치이념의 根底에 있는 고대 중국인외 世界觀— 이는 石田一良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神秘的․合理主義的인 世界像․宇宙像이 되겠는데— 과 매우 비슷한 宇宙論的 세계관은 앞에서도 약간 비쳤듯이 夫餘를 비롯한 부여족 계통의 諸國에서도 보이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세계관과 나아가서는 거기서부터 派生되어 나올 수 있는 정치사상은 본래 부여족의 ᅳ 派에 의해서 건국된 백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백제의 ‘周植’적 정치사상이 중국문화의 영향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한편 이같은 정치사상에는 부여족 계통의 諸國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일부 符合되는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백제문화에서는 전반적으로 馬韓 土着風의 그것에 지배층인 부여-고구려의 北方 陸的인 요소 다시 거기에 중국문화의 영향이 상호 交錯하는 복잡한 樣相율 보이고 있거니와 그것은 정치사상에 있어서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점이 종래 백제국의 ‘周禮’적 정치이념의 연원율 추구하는데 있어서 일부 혼선을 빚게 한 素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