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백제 역사에서 위덕왕대는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위덕왕은 재위 45년 동안 백제의 대내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내부체제 정비와 왕권강화를 이룩하고자 했으며, 긴박하게 변화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적극적 대외정책을 추진하면서 백제의 외교적 위치를 강조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위덕왕대는 최근 발견되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인해 더욱 주목되었다. 문헌사료의 부족을 보완해 줄 고고학적 발굴 성과 검토를 통해 위덕왕대 정치, 사회, 사상, 문화 등에 대한 이해는 더욱 풍성해졌다. 그런데 위덕왕대 역사전개 과정 중 명확하게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위덕왕 사후 왕위계승문제라고 생각된다.
그 존재와 신분에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위덕왕의 왕자로 생각되는 아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형제 혜왕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혜왕의 왕위 계승은 이후 백제 정국 운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더욱 주목된다.
위덕왕은 재위 기간 내내 왕권강화를 추구하였고, 점차 성왕계에서 벗어나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의 가계에 대한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위덕왕 재위 후반 왕자 아좌의 정치적 위치와 역할은 매우 중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위덕왕대 말 왕자 아좌가 왜에 파견되었던 것은 단지 백제 내부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만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6세기 후반, 수의 등장 이후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되고 있었고, 특히 왜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아좌의 대왜파견이 주목되는 것이다. 즉 위덕왕이 당시 왜의 외교적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수의 등장 이후 복잡하게 전개되던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교관계 속에서 백제는 왜를 통하여 고구려, 신라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때 고구려가 대왜외교에 집중하였다는 점에서 백제는 왕자 아좌를 왜에 파견하여 대왜외교를 이끌어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즉 위덕왕은 아좌를 통해 왜의 대백제 외교정책이 변화되는 것에 대해 대비하고자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좌가 파견된 후 진행되는 왜의 신라공격계획, 백제와 고구려의 계속된 대신라공격 등의 모습을 통해 아좌의 도왜 목적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왜의 내부적 정치상황의 변화되고, 백제 왕위계승이 혜왕, 법왕으로 이어지면서 백제 왕족으로서 아좌의 위상 및 역할은 제한되었을 것으로 더 이상 활동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