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중국계 백제관료의 기원
3. 중국계 백제관료의 역할
4. 중국계 백제관료의 성격
5. 맺음말
요약
중국계 백제관료의 시원적 모습이 보이는 것은 고이왕 때부터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등장은 근초고왕 때이며, 이 무렵 백제는 중국 군현 지역을 높고 고구려와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대방군의 移置로 이 지역에 잔존한 漢人 세력들은 두 나라 사이에서 거취를 정해야 했다. 그런데 백제는 고이왕 때부터 대방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들은 친백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백제가 북상하자, 이 무렵부터 대방계 세력들이 대거 백제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왕인과 고흥, 장위 등의 등장은 구체적인 그 실례이다.
중국계 백제관료의 역할로는 먼저 이들이 가진 전신문물과 제도를 활용하여 국가체제의 정비에 기여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대중 교섭 때 사신으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신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중국계로 보여 그 중요성은 인지된다. 이들은 중국 사정에 밝아 국제 정세에 대처하고, 남조 위주의 대중 정책을 수립하였다. 근초고왕 때 동진으로부터 ‘영낙랑태수’라는 작을 받은 것은 백제 외교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추진한 세력은 다름 아닌 중국계 백제관료들이었다. 또한 왜로 파견된 오경박사 등 전문직인 박사를 관칭한 인물들도 중국계였다. 따라서 이들은 교육 활동도 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박사직은 점차 각종 전업 박사의 형태로 세분되어 그 활동 영역이 넓어졌다. 아울러 풍야부처럼 군사 자문 역할을 한 인물도 보인다. 북연계로 추정되는 그가 등장한 시점에 백제에서 선비․흉노의 관직인 좌․우현왕제가 운영된 것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비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중국계 백제관료는 국가체제 정비 과정에서 대외 교섭뿐만 아니라 대외 정책, 교육 활동, 군사 자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끝으로 제4장에서는 중국계 백제관료의 운영과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중국계 백제관료는 초기에 백제의 체제정비 과정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중 외교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사신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아울러 대왜 외교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웅진 천도 이후에는 왜계 백제관료의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계 백제관료의 운영은 현지 사정에 밝은 귀화인을 활용하려는 전반적인 외교정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중국계 백제관료는 수나라의 중국 통일 이후 점차 조공-책봉 관계의 확립에 따라 사신의 임무로만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는 현지 사정에 밝은 인물들을 등용하는 다시 말하면 인적 교류를 중시하는 외교에서 점차 국가의 공식 외교라인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백제는 예식진 일가의 예처럼 중국계 이주민들을 이주시켜 남진 정책에 활용하고 거점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였다. 이들은 토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웅진 천도 이후에는 점차 중앙관료로 정착하였다. 토착화된 중국계 이주민들이 관료로 등장하는 것은 중국계 백제 관료의 또 다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