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개로왕대의 정국변동과 결과
III. 문주왕대의 천도논의 및 참여세력
IV. 천도지 선정과정 검토
V. 맺음말
요약
475년의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침략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천도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 내부 갈등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수도의 선정은 정치적 판단의 결과이며, 정국운영의 향방과 관련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를 토대로 천도의 배경과 선정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개로왕은 즉위과정에서 정변을 통해 집권 세력의 교체를 단행함으로써 개로왕 중심의 정국운영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정국개편과 더불어 대외적으로는 직․간접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대내외적인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475년 고구려의 공격에 의해 개로왕은 패사하고 한성은 함락되었다. 개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주왕은 개로왕대 함께 활동했던 세력들이 한성함락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 지지세력이 미약했으며, 패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문주왕 대에는 개로왕 대와는 다른 새로운 세력이 부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문주왕 즉위 이후 등장한 세력들은 왕의 측근세력이었던 목협만치와 조미걸취, 개로왕 대에 배제되었다 재등장한 해씨와 진씨세력 그리고 구원군으로 참여하면서 등장한 지방세력들이었다. 문주왕 즉위 이후 가장 먼저 이루어진 조치는 천도였다. 천도의 주도세력과 관련해서는 웅진과 인접한 수촌리 고분군의 조영세력에 대한 검토와 분석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견해들에 대한 검토결과 현재로서는 수촌리 고분군 조영세력을 어느 특정 세력으로 비정할 수는 없으나, 주변의 다른 유적들의 조영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백제 한성기 유력한 지방세력의 하나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천도지의 선정 과정을 추정해 봄으로써 공지였던 웅진이 채택된 이유를 살펴보았다. 즉 문주왕 등의 왕실세력과 해씨와 진씨 등의 중앙 세력은 한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방어에 유리한 그리고 향후의 정국운영을 위해 세력 적 공지를 선호하였다는 점, 이와는 달리 구원군으로 참여했던 지방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기반 인근으로의 천도를 원하였다는 점, 이에 지방세력들이 주장한 여러 지역 중 차령산맥과 금강에 의해 육군의 방어에 유리하면서 수운교통이 편리한 금강유역권의 공지지역이 검토되었으며, 이중 수군의 공격에도 방어하기 유리했던 웅진지역이 채택되었다. 결국 천도지 선정은 어느 한 세력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각 세력들의 이해관계 속에 합의를 통해 이루어 졌다. 그러므로 천도를 주도한 세력은 없었으며, 천도 이후의 정국운영을 주도할 수 있는 세력 역시 없었다. 천도 이후의 혼란한 정국은 이러한 이유에 기인하였던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