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禰氏 세력의 백제 이주와 성장과정
Ⅲ. 멸망 전후 禰寔進과 禰軍의 활동
Ⅳ. 禰軍의 활동과 관련지어 본 ‘日本’ 및 ‘僭帝’
Ⅴ. 맺음말
요약
본 논문에서는 최근 발견된 백제유민 禰氏 가족 4명의 묘지명과 문헌자료를 통해 백제멸망을 전후한 시기의 禰軍과 禰寔進의 이중적 활동상을 살펴보았다. 禰氏 가족 묘지명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이를 무조건 부정하기보다는 기존의 문헌자료와 연계시켜 합리적으로 해석해보고자 했다.
禰氏는 5세기 초에 백제로 이주한 중국 출신 세력이었다. 웅진지역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갔으며, 무왕대에는 중앙정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 멸망시 熊津方領이었던 禰寔進과 그의 형 禰軍은 의자왕이 당에 투항할 때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당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당이 백제 故地 지배정책에 적극 참여했다. 禰寔進은 웅진도독부 예하의 東明州의 刺史로 활약했으며, 禰軍은 664년과 665년 두 차례에 걸쳐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또 670년 熊津都督府 司馬로서 신라에 가는 등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하였다.
<禰軍墓誌銘>에 기재된 禰軍의 활동 내용과 그가 받은 관작을 근거로 묘지명에 나오는 ‘日本’과 ‘僭帝’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日本’과 ‘僭帝’라는 표현이 나오는 부분은 660년 泗沘都城의 함락과 의자왕의 항복부터 663년 백제 부흥운동의 종말까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僭帝는 의자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서기』에도 기록된 禰軍의 일본 방문이 백강전투의 수습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 663년 백강 전투에 일본군이 2만 7천이나 참여했으나 대패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日本餘噍’의 ‘日本’이 국호로 쓰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한국이나 중국측 기록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른 사례와 함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고찰할 필요가 있다.
禰氏 가족 묘지명은 중국 출신 禰氏 가문의 백제 정착의 기록이자 백제멸망 이후 당의 관리로서의 활약상에 대한 기록이다. 禰軍과 禰寔進이 백제멸망시 보여주었던 모습은 이들이 백제사회에 정착했으되, 여전히 중국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는, ‘二重性’을 띤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禰氏 가족 묘지명은 주민의 이동과 교류가 활발했던 고대사회에서 이주민들이 어떤 소속 의식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고찰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