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위덕왕대의 왕권과 귀족세력
Ⅲ. 문헌자료와 〈舍利奉安記〉에 보이는 무왕대 국왕과 沙氏세력의 관계
Ⅳ. 맺음말 : 신출 문자자료를 통한 사비시기
권력관계 규명과 그 한계
요약
위덕왕대는 <창왕명 사리감>과 왕흥사지 출토 사리장엄구를 볼 때 567년(위덕왕 14) 단계에 이르면 집권 초기 왕권의 취약성을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혜왕, 법왕은 비록 짧은 기간 밖에 재위하지 않았지만, 위덕왕대 후반의 기조 속에서 정국이 운영되었고, 무왕도 정상적으로 태어난 법왕의 嫡子는 아니지만 庶子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오는 서동설화는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무왕조에 함께 나오는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를 서동설화와 연결시켜서 보는 것은 무리이다.
미륵사지 출토 <사리봉안기>는 미륵사 건립을 둘러싼 왕과 沙氏라는 귀족세력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암시한다. 무왕 3년 아막성 전투를 계기로 부각된 沙氏는 무왕 28년 이후 장군 沙乞의 활약으로 더욱 세력을 확대하였다. 무왕이 대외전쟁과 국정을 수행할 때 핵심적인 동반자로서 활약했으나, 무왕 33년(632)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게 되면서 대립의 관계로 돌아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의 건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리봉안기>에 따르면 적어도 미륵사 서탑이 완공된 시점인 639년에는 무왕과 沙氏세력의 관계는 경쟁과 대립의 관계였다. 미륵사 건립 작업이 沙乇王后로 대변되는 沙氏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