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신라의 운봉고원 진출과 前線의 형성
Ⅲ. 아막성 전투의 전개 과정
Ⅳ. 아막성 전투의 성격과 그 의미
Ⅴ. 맺음말
요약
본 논문은 7세기 초 신라의 소백산맥 以西지역 진출 시도라는 관점에서 아막성 전투를 새롭게 검토해보고자 한 것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3년조 기사를 중심으로 아막성 전투 과정을 구성하였는데, 그럴 경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24년조 및 『삼국사기』 열전 귀산전의 내용과 상충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막성 전투 관련 기사에 대한 사료비판과 각각의 사료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통해,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3년조 기사를 ‘당해 8월 사건 개관+사건 원인+당해 8월 사건의 상세한 내용’의 구조를 갖춘 것으로 파악해 보았다. 이에 따라 기존의 연구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신라의 4성 축조 및 백제 영역 침범’은 602년 8월 이전의 사건으로서 아막성 전투의 직접적인 발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6세기 중반 이후 羅濟 양국의 정세와 고고학적 유물의 출토 상황으로 볼 때, 신라는 565년 대야주 설치를 전후로 한 시점에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지역까지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운봉고원을 장악함으로써 백제의 경남 서부지역으로의 진출을 막고 있었으며, 백제는 섬진강 수계 유역에 축성하여 백제 內地로 진출할 수 있는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7세기 초 신라는 대내외적인 상황을 이용하여 운봉 지역에 小陁등 4성을 축조하여 소백산맥 이서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는데, 백제 무왕이 4만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아막성 전투가 발발하였다.
신라의 4성 축조 및 백제 영역 침범은 백제의 남원-장수 간의 교통로와 섬진강 하류 지역으로의 교통로 활용에 피해를 주었던 사건으로 보이는데, 이는 백제 내지로의 진출로 및 다양한 공격루트의 확보·섬진강 수계권 진출·백제의 對倭 교통로 차단을 목적으로 한 신라의 점진적인 진출 준비였다. 古龍郡 및 섬진강 수계권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던 백제는 4만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의 아막성(소타 등 4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러한 아막성 전투의 성격은 결국 신라의 소백산맥 이서지역 진출 준비에 대한 백제의 강력한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아막성 전투 승리는 백제의 소백산맥 이동지역 진출을 저지하는 한편, 그 승리를 바탕으로 남원과 임실 등의 전북 동부지역 및 백제 내지로 진출할 수 있는 우위를 마련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신라는 소백산맥 이서지역으로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에는 對고구려 관계의 변화와 고구려의 연이은 침입·對중국 교통로였던 한강 유역 방비의 중요성 증대, 전선의 확대 및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침입에 대한 방비의 어려움 등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