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Ⅰ. 한강유역 쟁탈 이전 동맹과 외교의 전개
Ⅱ. 한강유역 쟁탈전의 전개와 삼국
맺음말
요약
삼국이 한강유역을 경계로 접하게 되는 시기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한 시기가 아니라, 그 이전 5세기 전후 고구려 광개토왕이 남정전략을 통해 적극적으로 백제를 공략하면서 한강유역까지 진출한 때부터이다. 그 이전 4세기 후반 삼국은 외교 교섭을 통하여 동맹을 모색하였는데, 고구려와 백제가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신라였다. 신라 역시 동맹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 가운데 국제관계상에서 강국이었던 고구려와 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이 판단은 고구려 광개토왕이 왜의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신라를 재빠르게 구원한 점에서 정확한 것이었다. 한강유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고구려는 백제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백제는 기존의 가야-왜 동맹으로도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신라에게 접근하여 동맹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신라도 내물왕-실성왕-눌지왕으로 이어지는 왕위교체가 고구려의 내정간섭에 의해 이루어져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므로, 백제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왜는 신라와의 적대관계로 인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백제․가야․신라가 고구려에 대한 공수동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5세기 후반에 고구려가 공격한 대상은 신라와 백제였다. 이에 대한 백제-신라는 공동 대응한 경우도 있으나, 각국이 독자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백제는 주로 고구려에 대한 방어전략을 구사하면서도 수도 주변에 목책을 쌓아 신라에 대비할 정도로 양국이 절대적인 신뢰관계를 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6세기 전후 백제가 가야지역 서부로 진출하자 신라도 가야지역의 동부로 나아갔는데, 이는 양국의 상호 인식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한강유역을 두고 전개되는 삼국의 쟁탈전은 550년을 전후하여 본격화되었다. 6세기 전반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여 한강유역을 벗어나 더욱 더 남진해 왔으나, 540년대에 고구려는 내분 뿐 아니라 북방에 유목국가가 위협을 가하여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백제는 신라․가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회복하였으나, 기민한 전략을 앞세운 신라가 차지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521년 백제가 양과의 외교에 대동한 신라를 소국으로 소개하였는데, 이 거짓은 539년 양의 사신이 신라에 오면서 탄로가 났던 것이다. 반면에, 백제 성왕은 가야의 일에서 시작하여 한강유역 문제에 이르기까지 기만적인 외교책동이 불신당하고 대왜외교조차 실패하게 되어 한성과 평양 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백제의 僞計에 적절하게 대비하여 한강유역의 마지막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국제관계에서 진실과 정성으로 외교를 수행하는 나라만이 목표를 달성하고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