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삼국지』 동이전 마한 관계 기록의 비판
3.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 기록의 재해석
4. 맺음말
요약
이 글에서는 ?삼국사기?기록의 시간적 순차성을 인정하고, 각각의 기사는 백제 중심의 시각이 반영되었을지라도 그에 준하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는 전제하에 내용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온조왕조에 기록된 백제초기의 영역확장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백제본기 초기기록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온조집단은 고구려 건국세력의 일부가 그 세력을 유지한 채로 남하하였기 때문에,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강 유역에서 급속하게 고대국가를 형성해 주변 소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온조집단이 처음 도읍한 곳은 하북위례성(편년기사의 위례성)이었으며, 말갈의 침입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낙랑과의 우호관계를 잃어 하남위례성(편년기사의 한성)으로 천도하였다. 자연방어선인 한강의 확보로 인해 백제는 그동안 외부세력과의 교전에 집중되었던 국력을 내적 안정에 분산시킬 수 있었다.
비류집단의 근거지인 미추홀은 건국설화의 내용과 복속 당시의 정황을 분석하면 파주・양주일대로 비정되며 편년기사의 북부 해씨세력과 연결시킬 수 있다. 비류집단의 복속시기는 파주 지역에서 백제가 對말갈방어전을 수행하였던 온조왕 18년 전후의 시점으로 추정된다. 이후 점차 주변 소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켜나가던 백제는 ‘마한’과 충돌하였는데 이 때의 ‘마한’은 아산만일대를 세력권으로 한 초기 마한으로 진왕이 다스리던 목지국과는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백제는 한성 천도 당시에는 ‘마한’에 대해 복속 관계에 있었으나, 기만책을 동반한 기습공격으로 ‘마한’의 국읍을 병합하는데 성공하였다. ‘마한’ 내부의 동요 또한 백제가 수월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백제의 ‘마한’정복은 백제왕이 ‘마한’왕을 대신하여 ‘마한’사회를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할 뿐, 마한 전역에 대한 영역적 지배를 관철시킨 것은 아니었다. 백제의 세력권 이남으로 목지국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마한이 존재했으며, 이와 같은 상황이 3세기 중엽까지 이어져 ?삼국지?한조에 백제와 목지국의 존재가 나란히 기재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