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촌강전투와 전후 처리
1. 파병의 배경
2. 천도와 산성의 축조
3. 금전성의 위치
III. 국사의 파견과 방인·봉수의 설치
1. 국사의 파견
2. 방인
3. 봉수의 설치
IV. 맺음말
요약
일본열도에서 한반도로 병력을 파병할 때 대마도가 그 중계지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삼국시대의 신라 침입 때는 물론이고 고려시대 후기의 왜구 침입,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침입의 경우를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왜가 백제에 구원군을 파견하는 과정에서 대마도가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백촌강전투 패전 이후 대마도가 방어전략 상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재인식하게 되면서 아마도 일본 역사상 최초로 방인과 봉수를 설치하고 이어서 金田城을 쌓게 되었다. 변경으로서 대마도가 갖는 중요성을 웅변하는 것이 바로 防人과 烽燧이다. 방인 자체가 서쪽으로부터 예상되는 일본열도에 대한 침입에 일차적으로 대응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九州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배치된 防人 중에서도 對馬島의 防人이 최전선에 위치하였다. 봉수 또는 일본 역사상 국가적인 차원에서 설치한 것은 백촌강전투 패전 이후가 유일한 사례이다. 봉수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열도의 대응 자세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대마국으로 승격되었고, 중앙에서 國司도 파견되었다. 종래에는 縣主 등 현지의 유력자에게 대마도의 지배를 위임하고 있었다면, 백촌강전투 이후 대마도는 大和政權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國이 설치되고 國司가 파견되는 것이 大寶令의 시행 시점(701년)인 것을 생각하면 그보다 훨씬 이른시기에 대마도는 國으로 편제된 것이다. 또한 對馬島와 壹岐島는 비록 下國이지만 國守에 결원이 생긴 경우 大宰帥 및 三關國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또한 季祿의 경우도 京官 職事 이외에 지방관으로서는 大宰府와 더불어 그 지급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백촌강전투의 패전은 대마도가 일본고대국가의 변경을 수비하는 군사적인 요충지이자 행정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지역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