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漢城의 입지 조건과 熊津城 遷都배경
Ⅲ. 企劃 都城 사비성
Ⅳ. 海擲사건을 통해 본 백제와 東南아시아 諸國과의 교류
Ⅴ. 맺음말
요약
백제 도성은 江邊에 소재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소통과 유통, 그리고 교류의 수단인 하천변에 입지한 관계로 水路의 管掌에 유리하였다. 경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도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利點이 분명 존재한 것이다.
백제 건국기의 國都 選定說話는 백제인들의 도성 입지에 대한 안목과 기준을 제시해 준다. 이러한 기준은 백제인들이 기습적인 한성 함락으로 경황이 없었을 것 같지만, 새 국도를 물색할 때도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웅진성은 북쪽으로 금강이 접해 있는 관계로 시급한 고구려의 침공을 막는 천연해자 기능을 중시한 게 새 國都 選定 이유인 것처럼 운위되었다. 그러나 금강 水系를 이용한 전라북도 奧地에 이르는 내륙 지역에 대한 영향력의 행사와 더불어, 어느 때 보다도 긴요한 對中國·對倭 관계를 염두에 둔 입지 선정이었다.
이러한 立地 線上에서 계획하여 조성한 도시 사비성으로의 천도가 단행되었다. 바닷배가 출입할 수 있는 사비성으로 천도함에 따라 對中國·對倭 교류의 활성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금강이라는 內陸水路를 이용하여 전라북도 내륙까지 진출한 다음, 섬진강 수계와 연결지어 남해안 방면을 경유하여 일본열도로의 航進이 가능하였다. 백제가 사활을 걸다시피한 對中國 교류의 활성화라는 측면과 對倭 교류를 위한 안전한 항로의 개척이라는 측면에서 보자. 서해와 내륙수계를 가장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이 사비성이었다. 백제의 사비성 천도 요인으로는 海外交流의 활성화라는 목적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사비성 천도와 더불어 도성은 모두 25개의 巷으로 구획하였다. 이는 北魏의 사례에서 보듯이 주민 통제에 목적이 있었다. 실제 사비도성 各部에 주둔한 군대는 북위 낙양성의 근위병 배치와 유사하였다. 백제 사비도성과 북위 낙양성의 편제상 유사성은 영향관계를 고려할 수 있겠지만, 군사형국가의 國都라는 점에서 부합되는 측면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비도성 안에는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巷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신라인들이 거주하는 巷도 존재했던 것이다.
가칭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2개의 곱슬머리 陶俑을 통해서 백제와 동남아시아 지역간의 교류를 읽을 수 있다. 더구나 사비도성내에 외국인들로 구성된 巷의 존재는 백제왕이 천하를 통치한다는 천하관의 산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가 東南아시아 지역과 교류한 문헌 자료를 통해 사비성 천도를 통해 국제국가이자 국제도시로서의 威容을 확보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