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마한 세력권의 변천
1. 삼한의 모태로서 마한과 목지국 진왕
2. 목지국의 몰락과 마한 중심축의 남하
III. 영산강유역 세력의 성장과 신미제국의 등장
IV. 백제 근초고왕의 남정과 침미다례의 몰락
V. 내비리국의 성쇠
1. 내비리국의 흥성
2. 백제의 진출과 내비리국의 몰락
VI. 맺음말
요약
삼한의 맹주였던 馬韓은 서울 지역에서 성장한 백제의 성장과 맞물려 쇠퇴의 기로에 섰다. 그렇지만 영산강유 역의 마한 세력은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존속했음이 문헌 자료나 고고학적 물증을 통해 드러나 고 있다. 가령 289년에 新彌國 등 20여 國이 西晋과 교섭하였다. 해남반도에 소재한 침미다례와 동일한 정치체인 新彌國은, 목지국의 몰락을 기화로 지역연맹체의 맹주로서의 위상을 확보했다. 이 무렵 영산강유역에는 甕棺을 主된 墓制로 채택하였고, 급기야 高塚墳墓로까지 발전시켰다. 고유한 색깔을 지닌 강대한 세력 결집을 웅변해주는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新彌國 곧 침미다례는 369년 백제 근초고왕의 南征으로 인해 초토화되고 말았다. 반면 戰禍를 입지 않은 영산강유역의 羅州 반남 세력이 새로운 覇者로 등장하였다. 이곳은 마한 54개 國 가운데 內卑離國으로 지목할수 있었다. 內卑離國의 수장묘인 신촌리 9호분은 거대한 봉분에다가 신분의 지표가 되는 金銅冠과 大刀는 질과 양에 있어서 백제 지방세력의 그것과는 차이가 나고 있다. 백제와 구분되는 內卑離國王의 독자성과 권세를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인 것이다. 內卑離國은 良質의 鐵鑛과 海産 자원은 물론이고, 비옥하고도 광활한 농경지에서 축적한 剩餘農産物을 통해 마한의 맹주로서 번성을 謳歌하였다.
5세기 후반 백제는 漢城 함락으로 인해 熊津城 遷都를 단행했다. 이후 백제가 추진한 이탈한 지방 세력에 대한흡수라는 일련의 정복 과정이 펼쳐졌다. 5세기 말경 內卑離國은 백제의 外壓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역사의 激浪속으로 떠밀려 가고 말았다.
5세기 말까지 영산강유역의 馬韓 勢力은 장기간에 걸쳐 백제와 協力과 葛藤을 반복하였다. 또 馬韓은 백제와對峙하면서 독자적인 문화와 정치적 위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한 마한 세력은 494년에 만주 지역에 소재하였던東아시아의 老大國인 夫餘가 고구려에 병합될 쯤 백제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영산강유역에서 마지막으로 發花하였던 馬韓의 역사와 문화는 결코 잊어진 대상이 될 수는 없다. 加耶의 前身인 弁韓까지 호령했던 마한의 역사가 묻힐 수는 없지 않은가?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