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小國聯盟體와 聯盟王國의 개념
Ⅲ. 古爾王대는 聯盟王國 단계였던가?
1. 古爾王대 聯盟王國說의 근거가 된 문헌 기록
2. 3세기 후반 馬韓 伯濟國과 辰韓 斯盧國의 정치적 통합 수준 비교
Ⅳ. 고고학계의 백제 국가 성립에 대한 연구
Ⅴ. 聯盟王國 단계의 통치 형태와 물질자료
Ⅵ. 맺음말
요약
이 논문은 백제 古爾王대의 정치.사회적 통합 수준이 연맹왕국단계에 이르렀다는 기존의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현재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연맹왕국단계는 部體制단계와 마찬가지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단계로 넘어 가는 직전 단계를 가르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백제는 古爾王대(234~286)를, 신라는 奈勿麻立干대(356~402)를 聯盟王國 성립기 내지는 部體制성립기로 설정하고 있다. 백제가 신라보다 국가 형성 과정에서 100 여 년 앞섰다고 하는 이같은 인식에는 문제가 있다.
개념상 小國연맹체단계에서는 진한이나 마한처럼 小國들이 개별적인 정치체로서 독자성을 유지하고 小國간에 우열의 차이는 있으나 맹주국과는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와 달리 ‘연맹왕국’은 고대국가의 한 형태를 나타내는 용어이며, 이 단계에서는 맹주국이 소국을 정복하여 上下의 지배 복속관계를 형성하고 복속 지역에 대해 여러 유형의 간접통치를 실시하며, 피복속 소국은 대외 교섭권 등을 상실한다.
고이왕대를 연맹왕국단계로 인식한 것은 문헌 기록을 과대 해석한 결과이다. 290년 초까지도 마한 小國들은 西晉과의 교섭에서 小國으로서의 독자성을 유지하였고, 伯濟國은 가장 유력한 소국연맹체의 맹주국일 뿐 다른 小國들을 복속시켜 대외교섭을 독점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진한 斯盧國의 西晉 遣使 시작은(280년) 마한 보다 4년 늦을 뿐이며 이 때까지도 양 지역의 정치.사회적 통합 수준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고학자들도 성곽, 대형 무덤, 토기양식 등을 국가 성립의 지표로 삼아 3세기 중후반 경 백제는 일정 영역을 확보한 국가 단계에 도달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 국가 성립의 지표로 삼은 고고학자료의 편년이 연구자에 따라 3세기 후반~4세기 중후반 등으로 견해 차이가 크고 유동적이어서 고이왕대 연맹왕국설을 지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고이왕대 ‘연맹왕국’설 내지는 부체제설이 성립하려면 3세기 후반 백제국이 마한 소국을 정복하여 지배 복속관계를 확립하고 간접통치를 실시했음을 물질자료 등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3세기 후반대의 물질적 자료는 거의 확보되지 않고 있다. 반면 백제 지역에서 출토되는 東晋제 도자기, 금동관, 금동신발 등 간접통치 실시를 뒷받침하는 각종 위세품들은 모두 4~5세기대의 것이다. 신라사에서는 금동관 등의 위세품 등이 출현하는 이러한 단계를 연맹왕국단계 내지는 부체제 단계로 해석한다. 고이왕대를 연맹왕국 내지는 부체제성립기로 보는 문헌사가들 중에는 백제지역에서 출토되는 금동관 등의 위세품을 직접통치의 산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일한 성격의 고고학 자료에 대해 백제와 신라에 서로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