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백제 北界의 변화와 浿水 인식
Ⅲ. 백제 東界의 변화와 말갈, 낙랑과의 관계
Ⅳ. 백제 南界의 변화와 馬韓과의 관계
Ⅴ. 맺음말
요약
본 연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서기전 6)조에 보이는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이라는 강역획정 기사가 반영하는 시기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 기사에 대한 기왕의 견해는 온조왕대설, 고이왕대설, 근초고왕대설 등이 있으며, 고이왕대설이 통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론에 입각한 주장은 현재의 연구 성과에 「백제본기」의 사료를 꿰맞춘 결과로 생각한다. 오히려 「백제본기」의 자료가 보여주는 당시 백제인의 지리 인식을 추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浿河라는 지명은 고조선 혹은 낙랑 대방계 주민의 지리 인식으로서 그 위치가 역사상 변화되어 왔으며, 최종적으로는 대동강을 가르키는 지명이었다. 이러한 지명 인식의 관점에서 보면, 온조왕 13년 강역획정 기사의 패하는 대동강으로서 근초고왕대의 인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패하가 대동강전 유역으로 상정한 것은 아니고, 대동강 하류 즉 재령강과 대동강이 만나는 지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춘천으로 비정되는 走壤을 백제가 차지하는 시점 역시 307년(汾西王 7)에 樂浪西縣을 습격하는 기사 이후가 될 것이며, 그렇다면 역시 근초고왕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로 추정된다. 따라서 앞의 패수 기사와 연관시켜 본다면, 走壤을 영역으로 확정하는 시기 역시 근초고왕대가 가장 타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浿河와 走壤이 근초고왕대의 영역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熊川도 금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안성천이 웅천으로 불리던 시점이 있으나, 백제의 영역 확장과정에서 금강도 역시 웅천으로 불리웠기 때문에 웅천의 지명이동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백제본기」 온조왕대의 마한 관련 기사 역시 근초고왕대의 상황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근초고왕대에는 고구려와의 전쟁, 신라와 외교교섭, 가야, 왜와의 교섭, 晉에 사신 파견과 책봉 등 주변국과 다양하고 뚜렷한 국제관계를 맺고 있다. 그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달라지는 이러한 국제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당시 백제인의 영역관이 새롭게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온조왕 13년조의 강역획정 기사로 표현되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