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1. 백제 말 정치 세력의 대외 인식
1) 대당교섭을 통한 나당연합군에의 대응
2) 고구려․왜와의 연대를 통한 나당연합군에의 대응
2. 부흥운동군의 동향과 대외 인식
1) 부흥운동군과 고구려․왜와의 관계
2) 부흥운동군의 분열과 백제의 멸망
Ⅱ. 맺음말
요약
본고는 백제의 멸망 원인과 이후 전개되는 부흥 운동에서의 정치 세력의 동향을 외교 인식의 차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이는 백제 멸망당시 정치 세력의 분화를 백제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과정에 대한 대응 방법의 차이에 주목하여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백제는 660년이 아니라 663년 최종적으로 멸망하였음을 추정하였다.
멸망 전 백제의 정치 세력은 당에 대한 외교 인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부여융과 성충, 흥수 등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당과의 외교적 협상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652년 이후 당에 대한 사신 파견이 중단되면서 당과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고 생각한 세력들은 당이 아닌 왜·고구려와의 관계를 통해 나당연합군에 대항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다시 의직을 중심으로 고구려와의 연대를 통해 신라에 대한 공격에 중점을 두는 세력과 상영을 중심으로 하는 왜와의 연대를 통해 당군을 막는데 중점을 두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백제 내부의 이러한 외교인식의 차이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결국 웅진성으로 도피하였던 의자왕이 잡히면서 백제는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나 의자왕 항복 직후 일어난 백제 부흥군은 이후 왜 혹은 고구려와의 연대를 통해 백제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이 시기 백제 부흥군은 임존성과 주류성이라는 북부와 남부지역의 거점을 통해 북부에서는 주로 고구려와 남부에서는 왜와의 관계를 통해 남·북에서 전선을 구축함으로써 나당연합군에 대응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남부 전선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과 이로 인한 부흥군 내부에서의 분열, 흑치상지 등 일부 세력이 당에 항복하면서 이루어진 이탈 등은 부흥군 자체의 운동력을 급격히 저하시켰다. 그러면서 부여풍과 왜의 연합군이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배하게 된다. 남-북 양쪽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나당연합군에 대항하고자 했던 부흥군의 기본적인 전략이 무너지면서 북쪽에 남아 있던 임존성 지역의 지수신을 비롯한 부흥군 세력도 결국 나당연합군에 패배하게 하면서 백제는 최종적인 멸망을 맞게 된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