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대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당시 마한의 상태와 멸망기사를 재검토해 보는 차원에서, 온조왕대 백제와 마한의 관계를 통한 마한의 실체에 대한 연구 상황을 검토해 보았으며, 온조왕대 마한의 멸망과정을 통하여 드러나는 백제의 남방영역에 대하여 재검토해 보았다.
백제 건국세력이 마한지역에 들어왔을 때 마한왕이 동북 1백리의 땅을 떼어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백제는 처음에는 마한의 제후국과 같은 존재로서 한강유역에 자리를 잡았다. 백제는 마한왕에게는 신록을 잡아 바치는 등의 신속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주변의 삼한의 다른 소국들과는 경쟁관계 속에서 제압하거나 병합하면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온조 13년(기원전 6)에 이르러 천도를 단행하기 위해서 마한에 사전에 양해를 구하였으며, 드디어 웅천을 경계로 강역을 획정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백제는 온조왕 26년(기원후 8년)에 마한의 국읍을 습격하여 병합하였고, 온조왕 27년(기원후 9)에 드디어 마한이 멸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타나는 마한과 관련된 기록들을 후대에 의도적으로 온조왕대로 올려놓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마한이 멸망했다는 것은 중부지역의 목지국이 해체되어 남쪽으로 이동되어 갔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 경으로 보고 있다.
마한은 온조왕대 멸망당하지 않고 후대에 멸망하였다는 학설이 일반화되어 온조왕대 상황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백제 온조왕대의 기록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회현상과 기록마저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하여 백제본기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되어 백제 초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그에 동반한 백제 건국기의 마한사회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당시 마한세력은 금강 유역권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강역획정의 남쪽이 웅천으로 나타나고, 이 웅천은 금강으로 보인다. 백제가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 지방에 해당하는 고사부리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마한세력이 최소한 고사부리성(고부)보다는 위쪽에 있는 전북 북부 지역이나 충남 남부지역인 금강유역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온조왕대 마한 병합으로 백제의 영토가 한강유역을 넘어 금강 유역권까지 확장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