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史書에 의하면 百濟는 3세기 초에 東明의 후예인 仇台가 遼東에 웅거한 公孫度의 宗女와 혼인하면서 강성해지기 시작하여 그 후손이 帶方 땅에 처음으로 건국하였다고 한다. 이는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紀에 백제가 ‘浿水―帶水―漢水’로 이어지는 지역을 강역으로 한 사실, 百濟王이 公孫氏인 帶方太守의 딸과 혼인한 사실을 통해 확인된다. 仇台는 시기상 百濟의 제6대 仇首王에 비정될 수 있는데, ‘仇台’는 ‘仇首’와 ‘仇’자가 동일하고 비류전승상의 시조인 ‘優台’와는 ‘台’자가 일치한다. 백제의 王系에서 仇首王의 아들이 比流王인 사실과 비류설화에서 優台의 아들이 沸流인 사실을 감안하면, 仇台, 優台, 仇首가 동일 인물인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優’가 簡字로 ‘우’로 표기하여 ‘仇’와 자형상 유사한 사실은 이를 더욱 뒷받침한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와 건국주의 관계는 ‘始祖=建國主의 父’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에 따르면 비류전승상에서 시조는 優台이지만 建國主는 沸流가 되는데, 이는 중국사서에 ‘百濟’라는 국호가 沸流와 동일인으로 여겨지는 比流王의 재위기간(304~344) 중인 344년 이전에 등장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백제의 시조는 仇台(=優台=仇首)이고 建國主는 沸流(=比流王)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온조전승이 백제의 정식 시조전승으로 인정되면서 시조가 東明이고 건국주가 溫祚로 되어 있다. 이는 백제의 정식 시조전승이 비류전승에서 온조전승으로 바뀌었기 때문인데, 그 시기는 백제가 자신의 出自를 ‘夫餘의 別種’에서 ‘夫餘의 正宗’으로 바꾼 사실과 관련이 있다. 泗비 천도와 함께 국호를 南扶餘로 개칭한 聖王 때 出自觀 변화에 따라 시조전승의 교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東城王―武寧王―聖王―威德王’으로 이어지는 東城王系는 近蓋婁王으로도 불린 蓋鹵王의 傍系로서 백제의 왕통에 편입되는데, 이는 ‘古爾王-責稽王-汾西王-契王’으로 이어지는 古爾系가 蓋婁王의 傍系로서 백제의 왕통에 편입되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傍系로서 왕통에 편입된 古爾王의 治績을 개국 군주에 걸맞게 미화함으로써 傍系의 의한 王統 장악을 정당화한 것이라 하겠다. 東城王系인 聖王 때 出自觀이 ‘夫餘의 別種’에서 ‘夫餘의 正宗’으로 바뀌면서 國號도 南扶餘로 바꾸고 시조전승도 비류전승에서 온조전승으로 교체한 것이라 하겠다. 시조전승의 교체에 의해 백제 국내 기록에서는 沸流의 親父를 시조로 하는 優台廟가 東明廟로 개서되었지만, 국외 기록에서는 개서되지 못하여 仇台廟(=優台廟)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