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戰略的 要衝地로서의 比斯伐加耶
Ⅲ. 羅ㆍ濟의 進出과 그 機能
Ⅳ. 6세기 前半 各國의 政勢와 比斯伐加耶의 滅亡
Ⅴ. 맺음말
요약
본고는 일본서기 초기기록과 일본서기 신공기 기사를 통해 신라와 백제의 접전 지역에 해당하는 창녕지역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살펴보고자 하였다.
가야시대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성들의 분포와 일본서기에 보이는 구례산의 위치를 감안할 때 4~6세기 나제간의 각축기에 비사벌가야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백제 근초고왕은 4세기 후반 낙동강 유역 경략시에 비사벌가야를 그 선공지로 삼았으며 그 공제방법에도 신경썼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결론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이른바 신공황후 임나 7국 정벌 기사를 수정론에 입각하여 백제의 가야지역 진출기사로 봄으로써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비사벌가야를 포함한 낙동강 중류 동단지역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는 기존 시각의 재고를 요한다.
가야제국의 자주성 회복운동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관계 속에서 가야제국은 서서히 붕괴되어 나간다. 비사벌 가야도 이런 상황 속에서 6세기 전반 신라에 귀속되고 555년 신라의 하주 설치로 인해 완전히 멸망된다. 이러한 비사벌가야의 멸망은 고대국가 발전기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영토팽창을 위한 전쟁의 와중에서 역량이 열세한 국가가 주위 강대국에게 복속되어가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비사벌가야의 경우에 자체 발전의 역량이 여간히 있지 않고서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주변 강대국들 간의 각축 속에서 결국 멸망되고 말았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