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大學寮 성립 이전의 學生과 博士
Ⅲ. 대학료 성립 이전의 신지식 전수
Ⅳ. 대학료와 陰陽寮, 内外藥寮의 성립
Ⅴ. 맺음말
요약
본고에서는 大學寮와 陰陽寮, 전약료 등이 설치되기 이전에 학문과 기술이 어떻게 수용되고 전수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첫째, 대학료 소속의 학생의 학생이 생기기 이전 시기의 학생은 중국으로 渡航한 유학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박사는 백제에서 파견된 五經博士를 비롯한 諸博士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학료 성립 이전 단계에는 일본에서 학문과 관련된 활동에 종사한 박사를 임명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둘째, 繼體朝와 欽明朝까지는 일본의 신지식 수용은 백제의 諸博士와 僧侶交代制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6세기 전반기의 일본은 신지식의 수용을 백제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일본 내에서 자체적으로 학문이나 지식의 재생산기반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은 찾기 어렵다.
셋째, 백제와 일본 간의 제박사교대제와 승려교대제가 막을 내린 6세기 후반이 되면 일본은 한반도 諸國과의 교섭을 통해 신지식과 문물에 관한 수요를 충당하였다. 교섭 노선은 다양화되었지만, 신지식의 전수는 여전히 외부 의존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넷째, 推古朝부터는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문승과 학생이 주축이 되어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私塾을 세워 가르치는 등 신지식의 외부의존적인 구조를 탈피하기 위한노력이 시도되었다. 또 도래인이 가진 지식을 일본 내에서 체계적으로 전수하게 함으로써 학문과 기예의 확대 재생산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다섯째, 위와 같은 학문과 기예 등 신지식 수용을 위한 기반 위에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한 뒤 백제의 유민이 대거 유입되면서 다양한 학문과 지식을 겸비한 백제의 지식인을 박사로 삼아 天智朝에 大學과 大學寮가 성립되었고, 天武朝에는 陰陽寮, 內外藥寮 등이 성립되면서 경학을 비롯한 음양, 의약학 등의 신지식과 기술의 재생산 구조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맺음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