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高句麗 · 百濟遺民 묘지명과 연구
Ⅲ. 북조대 樂浪 · 高句麗流民 묘지명과 연구
Ⅳ. 맺음말
요약
중국에서 출토된 고구려・백제유민 묘지명은 1917년 羅振玉(1866~1940)의 『芒洛冢墓遺文』 第4編에 扶餘隆(卷3)・高慈(卷4)・泉男生(補遺)의 墓誌가 수록되면서부터 알려졌다.
1990년대 이래 묘지명을 이용한 고구려・백제 유민사 연구는 크게 늘어났다. 망국민에 대한 삶과 애환의 문제를 떠나 연구가 활기를 띈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묘지의 주인 곧 誌主의 행적과 관직 등의 경력은 문헌사료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자료적 가치 때문이다. 둘째, 2003년부터 중국 측에서 고구려・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지배층을 비롯한 遺民의 주력이 당에 ‘歸屬과 漢化’되었다는 동북공정 연구의 쟁점의 하나로 부각된 점, 셋째, 백제유민 祢軍墓誌의 출토를 계기로 백제・고구려의 멸망기 倭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가 늘어나면서 일본・중국 등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온 때문이다.
1991년 이후 새로 알려진 묘지가 22점에 달해 새로운 자료의 출토도 계속될 전망이며, 이에 따라 관련 연구도 다양하게 될 것이다. 현재 연구는 새로운 자료의 소개와 이를 기존 연대기 자료와의 비교, 보완이 중점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자료가 늘어날수록 고구려・백제 유민의 구성과 범주 설정이 우선적으로 검토할 과제로 여겨진다. 당대 유민자료라 하더라도 멸망 이전 중국으로 이주하였던 동이계 주민(부여・고구려・낙랑 등)과 중국계 주민으로 4세기 이래 고구려와 백제와 망명하였다가 중국으로 귀환한 사례 등 유민의 성분과 계통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北朝代 금석문 중에는 4세기 초 낙랑군 소멸 후 중국으로 유입된 樂浪流民과 夫餘・高句麗流民의 묘지명 자료도 적지 않다. 이들은 선비 모용부에 의해 요서 대능하지역으로 옮겨진 후 三燕(전연・후연・북연)의 지배하에 있다가 北魏에 의해 平城 일대로 徙民되고, 다시 북위의 南遷에 따라 關中지역으로 이동한 존재들이다. 이 시기 동이계 및 중국계 유민들은 고구려의 요동・요서 진출 과정에서 그 귀속이 무상하였다. 이들 유민의 이동 경로와 배경 및 북조대 실상은 해당 한국고대사 연구의 이해에도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夫餘系 流民으로 생각되는 似先氏가 北魏에서 唐代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통해 당대 고구려유민의 구성이 일률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