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6세기 초 한반도 국제정세의 변화
3. 안라의 동향과 ‘近江毛野臣’ 전승
4. 소위 ‘임나부흥회의’와 안라ㆍ백제ㆍ왜
5. 독산성 전투 이후의 안라
6. 맺음말
요약
6세기 동아시아 정세 형성의 단서는 5세기 말(475년)의 한성백제의 몰락에서 구할 수 있다. 이러한 한반도 중부 지역의 지정학적 변화는 한반도 남부 지역의 諸國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안라는 백제의 동진과 신라의 서진 사이에서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친백제 노선을, 때로는 친신라 노선을, 때로는 친고구려 노선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최종적 선택은 친백제 노선으로의 회귀였다. 이러한 외교책의 부침은 당시 안라가 처한 모순적 현실 즉 전통적 우방인 백제와의 관계에서 〈동맹과 견제〉라는 이율배반적인 노선을 사이에 두고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안라의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안라 측이 주도한 소위 안라 고당회의와 백제 측이 주도한 소위 임나 회복 3책은 모두 양자의 입장 차이를 드러내며 성공적으로 수행되지는 못하였다.
한편 당시 왜국은 계체 신왕조의 성립과 규슈의 이와이 세력과의 전쟁등이 상징하는 것처럼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며 여전히 호족연합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근강모야신이 임나 회복을 위해 파견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만약 당시 왜국 사자가 왔다면 그것은 임나 회복 때문이 아니라 이와이의 난의 여파로 발생한 신라세력의 저지라는 왜국 내부의 문제를 도모하기 위해 왔을 것이라는 시점을 제시하였다.
562년의 안라의 멸망(신라의 가야 병합)을 결정지은 것은 바로 554년의 관산성 전투였다. 가야권 전체의 운명도 사실상 이 전투에 의해 결정지워졌다고 할 수 있다. 안라의 멸망은 곧 안라에 체류하고 있던 왜인들의 활동에도 종말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들은 안라와 운명을 같이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