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禰軍 墓誌」의 판독과 해석
Ⅲ. 「禰軍 墓誌」 관련 주요 논의사항
Ⅳ. 맺음말
요약
2011년 소개된「禰軍 墓誌」는 예군의 흥미로운 생애로 인해 한・중・일 학계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다만 각국 학계의 관심사에 따라 논의의 방향도 조금씩 차이가 있으므로,「 예군 묘지」의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 이들을 정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군은 613년 사비에서 출생했다고 추정되며, 678년 장안에서 66세로 사망했다. 예씨 일족의 묘지에서는 그들의 출자를 중국에서 찾았지만, 현재로서는 웅진지역에 연고를 가진 세력이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630년대 정계 입문 적령기였던 예군은 마침 무왕이 웅진 지역과 맺은 모종의 관계 속에서 백제 정계에 진출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의자왕의 항복은 예군의 동생인 예식진이 주도했다고 보지만, 묘지의 서술 및 예군이 당에서 받은 관직을 고려하면 그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백제 멸망 이후 예군은 동생 예식진과 함께 웅진도독부 체제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당의 동북아시아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禰軍 墓誌」에는 ‘日本’을 명시한 구절이 있어 주목을 받았는데, 이 부분은 백강 전투 및 그 사후처리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와의 교섭은 묘지에 기록될 정도로 예군 본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필자 초록)